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의 내용을 담은 대규모 탄소 배출 감축 계획을 제안했다. EU 27개 회원국과 유럽의회 승인 절차를 넘으면 한국 철강·알루미늄업계가 가장 먼저 부담을 안게 될 전망이다. 연료에 탄소세가 적용되는 항공·해운업체도 지출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자동차업계는 내연기관차가 유럽시장에서 퇴출되면 전기차 중심의 승용차와 수소차 중심의 상용차(버스·트럭 등)로 전환하는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조선업계는 친환경 선박 전환을 위해 발주가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14일(현지시각) 기자간담회에서 탄소배출 감축을 위한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 철강, 세이프가드에 탄소국경조정제까지… 수출 11.7% 감소 전망

15일 산업통상자원부와 무역협회에 따르면 전날 EU집행위는 탄소국경조정제도안을 제시했다. EU로 수입되는 제품의 탄소 함유량에 EU 탄소배출권거래제(ETS)와 연계된 탄소 가격을 부과해 징수하는 조치다. 2023년 1월 1일부터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기 등 5개 분야에 우선 적용하기로 했다. 배출량 등 보고 의무만 부여하는 3년의 전환 기간을 거쳐 2026년 전면 도입하는 것이 목표다.

그대로 적용되면 EU의 철강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로 이미 수출에 어려움을 겪어왔던 한국 철강업계의 부담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EU에 철강 15억2300만달러(약 1조8000억원)을 수출했는데 최근 5년 가운데 가장 적었다. 철강 수출량은 2018년 294만6000톤을 정점으로 EU의 철강 세이프가드가 시작된 2019년 278만4000톤, 2020년 221만4000톤으로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탄소국경세를 적용할 경우 수출 물량은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국제사회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 상향과 한국의 대응방안’ 보고서를 통해 EU가 비금속광물제품과 1차 철강제품에 탄소국경세를 적용할 경우, 수출이 11.7% 감소할 것으로 추산했다. 연간 수출액에 단순 적용하면 약 4000억원 규모의 피해다.

산업부는 이날 한국철강협회 포스코(POSCO), 현대제철(004020), 동국제강(460860), KG동부제철, 노벨리스코리아 등과 함께 민관합동 대응방향 논의한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좀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갈수록 탄소중립 스케줄이 당겨지는 점이 부담”이라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한 HMM의 초대형 컨테이너선. /대우조선해양 제공

◇ 항공·해운사 연료에 ‘탄소세’… 조선업계는 수혜 기대

기존에도 비용에서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항공·해운업계의 고민은 더 깊어질 전망이다. EU 집행위는 탄소배출권거래제를 조정해 항공운송에 대한 무료 배출허가권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해상운송 분야도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또 EU에서 이륙하는 모든 항공기에 전기기반 연료를 포함한 지속가능한 항공연료(SAF)의 혼합 사용 의무를 예고했고, 선박에 사용되는 연료에도 온실가스 배출량 제한 등을 통해 탈탄소화에 대응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항공업계의 경우 바이오연료나 재생가능연료 등으로 만든 그린제트연료 사용은 1% 수준이다. 기존 항공유보다 가격이 3배가량 비싸기 때문이다. 앞서 EU 집행위는 SAF 혼합비율을 2025년 2%, 2030년 5%, 2035년 20%, 2040년 32%, 2050년 63% 늘려나가는 방안을 제시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전까지 대한항공(003490)이 1년에 연료비로 3조원, 아시아나항공(020560)이 2조원을 사용했던 것을 고려할 때 연간 부담이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 단위로 늘어날 수 있는 셈이다.

해운업계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는 EU의 ETS 가격 50유로(60달러)를 기준으로 허용치 외의 연료소모량에 대한 배출권 구매비용을 연료 1톤당 약 186달러로 추정했다. 그러면서 향후 유럽지역의 배출권 가격 상승에 따라 비용은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싱가포르에서 현재 선박용 경유(MGO)가 톤당 600달러 수준인 것을 고려할 때 단순 계산하면 기름값이 31%가량 오를 수 있다는 의미다. HMM(011200)은 지난해 약 150만톤의 연료를 사용, 연료비로 5000억원을 썼다. 최종적으로 EU가 선사들에게 어느 정도 규모의 탄소 배출량을 허용해줄지, 또 앞으로 EU ETS 가격이 더 오를지 등에 따라 변동성이 크지만 1000억원 이상의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조선업계는 수혜를 기대하고 있다. 대표적인 친환경 선박으로 불리는 액화천연가스(LNG)선 발주가 늘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친환경 선박 등에 힘입어 한국조선해양,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010140) 모두 연간 목표치 조기 달성에 가까운 상황이다. 다만 LNG선도 차츰 강화되는 환경규제를 충족하기 어려워 수소로 대표되는 차세대 선박 개발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21년형 엑시언트 수소 전기트럭 출시. /현대자동차

◇ 차량 탄소 배출 기준도 강화… 현대차 ‘수소 드라이브’ 가속

EU 집행위는 또 차량의 이산화탄소(CO₂) 배출 기준을 강화하는 안을 제시했다. 2030년부터 신규 차량의 탄소 배출을 올해보다 55% 줄이고, 2035년부터는 100% 줄이는 계획이다. 현재 EU의 기준치인 ‘㎞당 온실가스 95g’도 가솔린이나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충족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실상 2030년을 기점으로 기존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내연기관 차량을 시장에서 퇴출하겠다는 취지다. EU 집행위는 이와 관련해 지역 내 주요 도로에 60㎞마다 전기충전소 설치를, 150㎞마다 수소 충전소 설치를 확대하겠다는 대책도 밝혔다.

현대차(005380)기아(000270)는 친환경차 판매 전략을 더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수소차 판매율 1위를 기록 중인 현대차는 세계 최초로 대형 수소 전기트럭도 양산하고 있다. 반면 기술이 뒤진 중견 완성차업체들은 앞으로 설자리가 더 좁아지게될 가능성이 커졌다. 완성차업계 관계자는 “EU는 지난해 중국보다 큰 친환경차 시장으로 올라섰다”며 “탄소저감을 위한 정책이 계속 나올텐데 결국 기술력에 따라 기업들의 성쇠가 빠르게 판가름날 것”이라고 말했다.

EU 집행위의 이번 제안은 27개 회원국과 유럽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국가별·업계별로 2년가량 치열한 협상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