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업계와 조선업계가 올해 하반기 후판(두께 6㎜ 이상의 두꺼운 철판) 가격을 두고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철강업체와 조선업체들은 반기 단위로 후판 물량과 가격을 결정해 계약한다. 포스코(POSCO)와 현대제철(004020), 동국제강(460860) 등 철강업체들은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후판가를 올려야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한국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010140), 대우조선해양 등 조선업체들은 여전히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추가 인상은 어렵다고 맞받고 있다.
15일 조선·철강업체에 따르면 철강업체와 조선업체들은 하반기 후판가 협상에 돌입했다. 후판 가격은 배 한척을 만드는데 드는 총 비용 가운데 약 20%를 차지한다. 후판 가격이 5만~7만원 오르면 조선업계의 원가 부담은 연간 약 3000억원 늘어나, 반기마다 치열한 협상이 이어진다. 최근 원재료 가격과 수급 상황 등을 따져볼 때 추가 인상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 조선용 후판가, 다른 산업 후판가보다 35% 저렴
조선용 후판 가격은 상반기 10만원가량 오르며 현재 톤당 85만원 안팎 수준이다. 유통가 기준인 만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산업의 후판가가 톤당 130만원을 넘어선 것과 비교해 34.6%가량 저렴하다.
반면 원재료 비용은 크게 올랐다. 산업통상자원부 원자재 가격정보에 따르면 중국 칭다오항 기준(CFR) 철광석 가격은 지난 14일 기준 톤당 220.77달러를 기록했다. 1년전과 비교해 2배 이상 올랐다. 중국 정부의 개입으로 지난달 말 200달러선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반등했다.
특히 철광석 공급 차질이 이어지고 있다. 브라질 최대 광산업체 발레(Vale)사의 수출량이 홍수와 수출 항만 화재 등 악재가 이어지면서 시장 예상치보다 적은 상황이다. 발레사의 지난달까지 수출량이 연말까지 이어지면 연간 2억5200만톤 수준으로 시장 전망치 연간 3억2000만톤을 20%이상 밑돌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철광석 가격 강세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원료탄 가격도 톤당 169.2달러로 지난해 동기보다 62.2% 올랐다. 철강업계에서 이같은 원재료비 상승 등을 고려할 때 후판 생산비용이 지난해 하반기 15.4%, 올해 상반기 35.7% 상승했다는 추산치도 제시됐다. 업체마다 계약내용에 차이가 있지만,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늘어난 비용이 상반기 후판가 인상폭(약 13%)을 넘어선다는 의미다.
◇ 中·日서 수입 어렵고 韓 조선용 후판 생산량 감소
조선업체들이 중국과 일본산 후판 비중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어렵다. 지난해 3분기만해도 중국과 일본에서 재고 처리를 위해 후판을 저가 수출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올해는 각국의 내수 물량을 채우기 바쁜 상황이다. 가격도 유통가 기준 중국산과 일본산 모두 톤당 1000달러(약 110만원) 안팎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수출 물량이 가파르게 줄었다. 중국의 지난달 철강재 수출은 572만1000톤으로 지난 4월보다 33.9% 감소했다. 중국 정부가 내수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달 열연, 후판 등 146개 철강제품에 수출증치세 환급을 취소한 여파로 풀이된다. 오는 7월부터 판재류 위주로 수출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와 향후 수출 물량이 더 줄어들 수 있다.
국내 조선용 후판 생산량은 감소세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 4월까지 조선용 후판 생산량은 115만8327톤이다. 2019년 동기(147만9765톤)나 2020년 동기(126만3775톤)보다 각각 21.7%, 8.3% 적다. 조선업계가 수주 가뭄을 겪으면서 후판 수요가 적었던 것에 비해 해상풍력 구조물 등 에너지산업 수요는 늘어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부와 철강업계가 후판 생산량을 늘리기로 했지만 수요 산업들의 요구치를 모두 채우기 빠듯한 상황에서 조선업체들이 가격 인상 없이 물량을 확보하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기업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결국 이익인데 현재의 조선용 후판값은 철강업체들의 생산을 독려하기 민망한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 조선 수주도 신조선가도 개선… 실적 '시차'가 관건
무엇보다 조선업계의 상황이 개선됐다. 영국의 조선·해운시황 분석업체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한국의 누계 수주량은 212척, 832만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다. 지난해 같은기간 누계 수주량 109만CGT의 약 7배 수준이다. 2008년 1~5월 967만CGT를 기록한 이후 13년만에 최대 규모다.
새로 건조하는 선박의 가격도 올랐다. 클락슨리서치 신조선가지수는 이달 들어 137을 기록했다. 6개월째 상승하며 2014년 12월 137.8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는 물론 중국 조선소가 약 2년치의 일감을 확보한만큼 저가경쟁으로 인한 신조선가 하락 가능성도 크지 않다.
다만 조선업계는 수주 상황이 실제 실적까지 반영되는데 1년 이상의 시차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선박의 경우 수주 후 설계부터 건조, 인도까지 2년 가까이 시간이 걸린다. 이 기간 동안 선박 건조 진행률에 따라 수주금액을 나눠 받는다. 올해 하반기 실적은 수주량이 급감했던 2019년 하반기부터 지난해 수주분이 반영된다는 취지다.
당장 올해 1분기 대우조선해양은 적자로 전환했고, 삼성중공업은 영업손실 폭이 커졌는데 후판값 인상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내년에나 실적이 개선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후판값이 또 크게 오르면 경영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조선업계의 상황을 고려해도 철강업계가 '고통분담'을 넘어 적자 부담까지 지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가격은 수급 상황과 국제 시황에 맞춰 오르고 내리는 것"이라며 "원재료 가격이 뛰었는데 조선업계가 어렵다고 철강업계가 그 부담을 질 수는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