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미국에 소형 모듈 원자로(SMR)를 건설하겠다고 밝히면서 국내 에너지 업계에서도 관련 기술에 관심이 쏠린다. 빌 게이츠가 도입하려는 소형 원자로는 액체 나트륨(소듐)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소듐냉각고속로(Sodium-cooled Fast Reactor·SFR)다.

모든 원자는 안정해지려는 경향이 있는데,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처럼 핵이 무거운 원자는 안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자연상태에서 계속 분열한다. 원자핵이 분열할 때 2~3개의 중성자와 많은 에너지가 나온다. 이 중성자가 또 다른 원자핵과 부딪쳐 다른 중성자와 에너지를 쏟아내며 거대한 에너지를 생성하는데 이것이 원자력이다. 이 원자력으로 물을 끓여 터빈을 돌려 발전하는 것이 원자력 발전이다.

빌 게이츠 빌앤멀린다게이츠재단 공동 이사장

현재 널리 사용하는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는 물을 냉각재로 이용한다. 중성자는 냉각재인 물을 지날 때 속도가 줄어든다. 이런 저속 중성자는 우라늄 235만 핵분열시킬 수 있다. 자연상태에서 우라늄을 캐내면 그 안에 우라늄 238, 우라늄 235, 우라늄 234 등 여러 동위원소가 섞여 있다. 238이 99.3%에 달하고 235는 0.7%에 불과하다. 이 비율을 높이기 위해 농축 과정을 거친다.

액체 나트륨을 냉각재로 사용하면 중성자의 속도가 줄어들지 않는다. 이런 고속 중성자는 우라늄235를 소량만 사용하고 우라늄 238과 플루토늄을 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 우라늄 238과 플루토늄은 원전의 폐연료에서도 나온다. 이를 SFR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폐연료를 다시 사용하니 방사성 폐기물도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SFR은 기존 원전에 비해 사용후핵연료가 최대 95%까지 줄어든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사용후핵연료를 재사용하는 것은 획기적인 기술의 진보로 꼽힌다. 사용후핵연료를 완전히 없앨 수 있는 기술은 아직 없다. 우리나라는 지하 500미터 아래 임시 저장고에 사용후핵연료 1만5000톤 이상을 보관하고 있는데, 조만간 포화 상태에 이를 것이라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연구 결과가 있다.

북한은 폐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해 핵무기를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SFR은 폐연료에서 나온 플루토늄을 다시 연료로 사용하니 핵무기 제조 우려에서도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테라파워가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 중인 나트륨 소형원전 조감도. / 테라파워 홈페이지

◇ 빌 게이츠 “SMR은 신재생에너지와 상호 보완”

빌 게이츠는 SMR 개발을 위해 2006년 원자력 발전회사 테라파워(TerraPower)를 설립했다. 빌 게이츠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면서 저가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청정 에너지원으로 원전에 주목했다. 이후 테라파워를 통해 보다 안전한 차세대 원자로 개발에 주력해왔다.

빌 게이츠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소유한 전력 회사 ‘퍼시피코프’와 함께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의 폐쇄 석탄 공장 부지에 나트륨을 이용한 원자력발전소 ‘나트리움’을 건설할 계획이다. 빌 게이츠는 지난 2일(현지시간) 마크 고든 미국 와이오밍주 주지사가 주재한 화상회의에서 “기후변화를 대비하는 에너지 산업에서 나트륨이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했다.

풍력·태양광과 같은 신재생에너지를 도입해 탈원전을 추진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구상과 달리 빌 게이츠는 SMR이 신재생에너지와 상호 보완 성격을 갖는다고 보고 있다. 테라파워는 SMR을 날씨, 계절 등에 따라 발전량이 들쭉날쭉한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한 용도로 설계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력 수요가 적을 때 원자로에서 생성된 열을 저장해놨다가 풍력·태양광 기반 전력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올해 2월 전 세계에서 동시 출간된 책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에서 “지구온난화를 멈추고 기후변화가 불러올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면 온실가스 배출을 멈춰야 한다. 원자력이 자동차나 화석연료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을 죽인다”고 주장했다.

SMR은 기존 원전에 비해 소형이라 건설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발전용량은 345㎿(메가와트)로 기존 원전(1000~1400㎿)의 30~40% 수준이다. 그만큼 건설비용이 저렴하다. 일반 원전의 건설 비용이 약 4조원인데 비해 테라파워의 SMR은 10억달러(1조2000억원)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기존 원전에 비해 연료가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운영 비용도 대폭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나트륨의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테라파워는 최근 이 문제점을 해결할 기술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형원자로 SMART 모형.

◇ 일찌감치 SMR 개발에 뛰어든 한국... 文정부 탈원전 정책에 지연

현재 미국, 러시아, 중국 등에서 70여종의 SMR을 개발 중이다. 아직 표준 모델이 없어 각 국가들과 기업들이 기술 개발을 위해 대규모 투자에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도 SMR 개발이 여러 방식으로 추진돼왔다. 우리나라는 과거 테라파워와 협업해 SMR 개발을 추진했었다. 2012년 한국원자력학회장이었던 장순흥 현 한동대 총장과 국내 원자력계 대표단은 미국 테라파워를 방문해 SMR 개발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빌 게이츠는 테라파워 회장 자격으로 2013년 4월 한국을 방문해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접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측이 개발 방식을 놓고 이견이 생기면서 2013년 말 협력이 무산됐다.

테라파워와의 협업 무산 이전에도 우리나라는 미국 기관들과 함께 SMR을 개발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폐연료 재활용 기술인 파이로프로세싱과 연계해 SMR 개발을 20년 동안 추진했다. 파이로프로세싱은 SMR 사용에 필수적인 기술로 원전 폐연료에서 아직 핵분열이 가능한 물질을 분리하는 기술이다. 여기서 SMR에 사용할 수 있는 우라늄 238과 플루토늄을 추출한다. 원자력연구원은 미국 국립아르곤연구소, 아이다호국립연구소,­ 로스알라모스연구소와 함께 기술 확보, 실증 등을 위해 지금까지 8000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투입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12월 이 사업의 재검토위원회가 출범, 4개월만인 2018년 4월 전면 재검토가 결정됐다. 안전성 규명과 사업 재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한미 공동 연구 활동만 남겨두고 시설 구축, 실증 사업은 모두 중단됐다. 사업 규모는 예산 기준으로 60% 감소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12월 제9차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 혁신형 SMR 개발을 공식화하면서 연내 예비타당성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다만 연구가 지연되면서 한국형 SMR은 2028년쯤에나 상용화될 예정이다.

원자력연구원이 한국수력원자력과 함께 자체 개발한 중소형 일체형 원자로 ‘스마트’(SMART)는 2012년 소형 원자로로는 세계 최초로 표준설계인가를 받았다. 대형 원전의 약 10분의 1로 소형화하고 안전성을 높였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들어 관련 사업이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임채영 원자력연 혁신원자력시스템연구소장은 “세계 노후 상용 원전 대다수(48기)가 500㎿급 이하인 만큼 SMR은 노후 원전 대체 시장에서 큰 잠재력을 갖고 있다”며 “저렴한 건설비로 투자 리스크도 적어 원전 분야의 세계적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