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가 CJ대한통운(000120)의 택배노조 단체교섭 요구 거부를 부당노동행위로 판정하고 교섭에 나서라고 결정하자 원청-하청 구조를 가진 자동차, 철강, 조선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번 결정을 계기로 하청업체의 노동조합이 원청업체를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중노위는 지난 2일 "CJ대한통운의 대리점 택배기사에 대한 노동조합법상 사용자성을 인정하고, CJ대한통운이 전국택배노조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한 것은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정했다. 그러면서 "단독 또는 대리점주와 공동으로 택배기사 노조와 성실하게 교섭에 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CJ대한통운을 비롯한 택배업계는 대리점과 위탁계약을 맺고, 대리점이 다시 택배기사와 계약을 맺는 구조다. 택배업체와 택배기사는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없기 때문에 지금은 대리점과 택배기사가 단체교섭을 진행한다. 하지만 대리점과 계약한 택배기사들이 소속된 택배노조는 원청인 CJ대한통운이 사실상 관리·감독하는 '진짜 사장'이라며 직접 교섭을 주장해왔다.
중노위는 대리점 택배기사가 CJ대한통운이 구축·관리하는 택배서비스 시스템에 편입돼 있고, 특히 CJ대한통운이 운용하는 서브터미널에서 배송상품 인수 등의 노무를 제공하고 있는 만큼 CJ대한통운이 구조적 지배력·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봤다.
중노위가 원·하청 계약이 위장계약이나 불법파견 소지가 없는데도 단체협상에 나서라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노위가 근거로 삼은 2010년 대법원 판례 역시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업체 4곳에 노조가 만들어지고 근로조건 협상을 요구하자, 하청업체가 폐업했던 사건이다. 당시 재판부는 원청인 현대중공업이 사업폐지를 유도, 조합의 활동을 위축시키거나 침해하는 지배·개입 행위를 했다고 봤다.
이와 별개로 현대중공업이 하청업체 노조의 단체협상 요구를 거부한 사건은 2018년 1심과 2심 재판부 모두 현대중공업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노동 3권을 침해하는 '지배·개입 행위'와 단체교섭 관련 부당노동행위를 구분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단체교섭에선 명시적·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돼야 한다고 했다.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2년 6개월 넘게 계류 중이다.
인천에서 활동하는 노무사 A씨는 "중노위가 기존의 결정들을 뒤집어야 하다보니 다소 무리하게 근거를 끌어온 것으로 보인다"며 "기존의 노동조합법이 개정되거나, 새로운 법이 제정된 것도 아닌데 판단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면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정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역시 "중노위의 이번 결정으로 하청업체는 경영권을 침해 받게 되고, 원청은 계약관계가 없는 제3자와 근로조건에 대해 교섭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원청이 하청업체 노조와 교섭에 나서면 반대로 하청업체에 대한 상당한 지휘·명령으로 인정돼 '불법파견'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원청 입장에서는 교섭에 응하든, 응하지 않든 형사 처벌 가능성이 생겼다"고 말했다.
재계에선 중노위의 이번 결정으로 하청 노조의 협상 요구가 쏟아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보험설계사나 방문판매원 등도 택배산업과 유사한 구조다. 도급 구조가 촘촘한 조선·자동차 등 제조업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택배노조는 중노위 결정 후 입장문을 통해 "(이번 결정으로) 우체국, 롯데(글로벌로지스), 한진, 로젠의 원청 택배사들도 당연히 노동조합과의 단체교섭의 대상이 된다"며 "'무늬만 사업자'인 특수고용직 노동자, 하청 노동자등을 비롯한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원청과의 교섭의 물꼬를 튼 감격적인 판정"이라고 했다.
지난해 4·5월 하청업체 노조의 단체협상 교섭 요구가 있었던 업체들은 더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당시 현대자동차, 기아(000270), 현대위아(011210), 한국GM, 포스코(POSCO), 현대제철(004020),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12개 사업장의 민주노총 산하 하청업체 노조가 원청기업들과 교섭을 요구했다. 이후 원청업체 대부분이 거부하거나 대응하지 않자 중노위에 공동으로 조정신청을 냈었다. 당시에는 중노위가 하청업체 노조가 원청을 상대로 교섭을 신청할 자격이 없다고 각하 판정했었다.
중노위는 "이번 (CJ대한통운) 판정은 CJ대한통운과 대리점 소속 택배기사 노조 사이의 단체교섭과 관련한 개별 사안을 다룬 것으로 원청의 하청노조에 대한 단체교섭 의무를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취지는 아니다"라고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경제단체 관계자는 "하청업체 노조들이 원청에 교섭을 요구할 수 있는 선례가 생겼다는게 중요하다"며 "다른 하청업체 노조도 CJ대한통운과 유사한 형태, 구조의 사업장이라고 주장하고 나설 것이 불보듯 뻔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CJ대한통운은 이번 중노위 판정에 불복, 행정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결론이 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현대중공업과 하청업체 노조의 단체교섭 요구 관련 재판은 2017년 12월 1심이 시작된 뒤, 2심을 거쳐 지금까지 대법원에서 심리 중이다. 재계 관계자는 "원청이나 하청업체 노조는 앞으로 비슷한 문제에서 소송에 나설 것"이라며 "결과적으로 사회적 혼란만 커지게 생겼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