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기차 시장이 최근 몇 년 간 이어졌던 캐즘(chasm·일시적 수요 둔화)을 벗어나며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현대차가 시장의 성장세를 따라가지 못하며 고전하고 있다. 올 상반기 현대차의 전기차 판매대수는 테슬라의 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모델Y 한 종에도 미치지 못했고, '한지붕 가족'인 기아의 절반 수준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29일 완성차 업계에 따르면 6월까지 국내 전체 전기차 판매량은 20만1096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18% 급증했다. 최근 몇 년 간 시장을 짓눌렀던 전기차 캐즘이 끝나고 수요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차의 전기차 판매량은 같은 기간 46.5% 증가하는데 그쳤다. 현대차는 6월까지 3만9575대의 전기차를 팔았다.
모델별로 보면 주력 제품인 준중형 SUV 아이오닉5는 전년 동기 대비 73.2% 증가한 1만1894대가 팔렸다. 중형 세단인 아이오닉6는 68.4% 증가한 4975대, 대형 SUV인 아이오닉9은 100% 이상 증가한 7239대가 각각 판매됐다.
그러나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의 GV60, GV70, G80 전기차는 판매량이 모두 1000대를 밑돌았다. G80 전기차는 전년 동기 대비 22.4% 늘어난 732대를 기록했다. GV60은 73.2% 늘었지만 판매대수는 627대에 머물렀다. GV70은 8.5% 증가한 714대가 팔렸다.
내연기관 모델을 기반으로 제작된 전기차를 보면 소형 SUV 코나 일렉트릭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9% 늘어난 2642대만 판매됐고 상용차인 포터 전기차는 2.1% 증가한 5148대가 판매됐다. 경형 SUV 캐스퍼 일렉트릭은 2% 감소한 4431대가 판매됐다.
전체 전기차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보면 현대차는 3위에 그쳤다. 기아는 올 상반기에 전년 동기 대비 151.1% 급증한 7만2078대를 팔아 선두를 내달렸고, 테슬라는 192.2% 늘어난 5만6139대를 기록하며 뒤를 이었다.
올해 상반기에 국산과 수입을 통틀어 단일 모델 가운데 가장 판매량이 많았던 차는 테슬라의 모델Y였다. 모델Y 프리미엄과 모델Y L(롱바디), 모델Y 프리미엄 롱레인지 등을 합친 판매량은 4만3359대를 기록했다. 현대차는 모든 전기차 라인업의 판매량을 합쳐도 모델Y 하나에도 못 미치며 체면을 구긴 것이다.
완성차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전기차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로 테슬라에 비해 밀리는 브랜드 경쟁력과 부족한 모델 라인업 등을 꼽는다.
◇ 테슬라에 쏠리는 전기차 팬덤… "현대차, 혁신 못하고 있어"
미국 전기차 제조사 테슬라는 여러 혁신적인 기술을 가장 먼저 선보이며 국내에서도 높은 관심과 인지도를 갖고 있다. 판매 차종 라인업은 모델Y를 비롯해 중형 세단인 모델3, 상용차인 사이버트럭 등 3종 뿐이지만, 이 가운데 모델Y가 다양한 형태로 제품 범위를 확장하며 국내 수요를 빨아들이는 상황이다.
테슬라는 특히 완전자율주행 기능인 FSD(Full Self-Driving) 기능이 탑재된 차량을 지난해 11월부터 국내에서도 판매하며 위상을 더욱 끌어올렸다. 미국에서 생산된 사이버트럭과 모델S, 모델X의 경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국내에서도 FSD 상용화가 허용됐다. 다만 모델S, 모델X는 현재 단종된 상태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되는 모델Y의 경우 중국에서 생산돼 FSD 기능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전동화 기술 수준이 탁월하고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의 브랜드 가치가 워낙 높아 현대차가 따라잡기에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테슬라는 기존 모델보다 전장은 180mm, 휠베이스는 150mm 각각 늘린 모델Y의 롱바디 모델을 출시하고, 편의사양을 줄여 가격을 낮춘 스탠다드 모델도 준비하며 다양한 수요층을 흡수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역시 자율주행 기술에 오랜 기간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지난 2019년부터 투자해 온 자율주행 스타트업 포티투닷을 2022년 완전히 인수하고 이후 자율주행, 전동화,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등의 개발을 전담하는 AVP 본부를 출범했다. 그러나 현대차는 지금껏 테슬라와 같은 수준의 완전자율주행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테슬라 외에도 제너럴모터스(GM)는 특정 조건에서 운전자가 전방을 주시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자율주행 기술인 아이즈오프(Eyes-off)를 개발해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바이두와 지리자동차 등 중국 IT, 완성차 업체들도 완벽에 가까운 자율주행 기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가 전동화와 연계되는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서 경쟁사들에게 뒤처지면서 전기차 시장에서 '혁신에 실패한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아 소비자들에게 외면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 전기차 라인업 확대한 기아… 3종 불과한 아이오닉, 브랜드 정립 실패
현대차는 지난 2021년부터 전기차 전용 서브 브랜드인 아이오닉을 운영해 왔다. 그러나 아이오닉 브랜드의 전기차 모델은 아이오닉5와 아이오닉6, 아이오닉9 등 3종에 불과하다. 역시 판매 차종이 적은 테슬라가 모델Y라는 '히트 상품'을 앞세워 국내 전기차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반면 아이오닉은 눈에 띄게 두각을 보이는 제품이 없다.
기아의 경우 소형 SUV인 EV3와 준중형 세단 EV4, 준중형 SUV인 EV5, 쿠페형 SUV인 EV6, 준대형 SUV인 EV9 등 판매하는 전기차 모델이 훨씬 다양하다. 상용차 시장에서도 전기 다목적 차량인 PV5를 지난해부터 판매 중이며, 한 체급 더 높은 PV7도 내년에 선보일 예정이다.
업계 관계자는 "기아는 경차부터 중·대형차, 세단부터 SUV까지 다양한 승용 모델에 전기차 전용 상용차까지 갖춰 기존 내연기관 모델들과 완벽한 균형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는 "단 3종에 불과한 라인업으로는 아이오닉이 전기차 브랜드로 입지를 넓히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며 "이 때문에 현대차는 그랜저, 쏘나타, 싼타페, 투싼 등으로 대표되는 내연기관 볼륨 모델(대량 판매 차종)이 주가 되는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앞으로 국내 전기차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는데 더욱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최근 저렴한 중국 전기차 제조사들의 진출이 잇따르면서 가성비를 찾는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국내에 진출한 BYD의 경우 올 상반기 판매량은 1만1675대로 전년 동기 대비 807.9% 급증하며 수입차 브랜드 4위를 기록했다. 올해는 중국 지리자동차그룹의 고급 브랜드인 지커가 중형 전기 SUV 7X의 판매를 시작했고, 체리와 샤오펑 등도 국내 진출을 앞두고 있다.
이항구 평택대 특임교수는 "전기차 라인업을 공격적으로 확대 중인 기아와 달리 현대차는 하이브리드차에 집중하고 있는 추세"라면서 "전기차는 내연기관차, 하이브리드차에 비해 마진이 작은 데다, 저가 공세를 펼치고 있는 중국 전기차와 가격 경쟁을 하기도 버거운 만큼 현대차가 전기차에 대규모 투자에 나서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