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기업들이 방위산업 시장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저성장과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 업체들의 공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반면 방산은 잇따른 전쟁으로 자금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5일(현지 시각) 르노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럽 최대 방산 전시회 '유로사토리 2026'에서 군용 차량 '4트루프(Troop)' 시제품을 공개했다. 이 차는 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라팔을 기반으로 프랑스 방산 기업 탈레스와 협업 제작한 모델로 이르면 내년 초부터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흙빛으로 위장 도색된 이 차량은 엔진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이 탑재됐다. 내부에는 탈레스가 개발한 전투 디지털 플랫폼 기술이 탑재된다. 무인 항공기와 무인 지상 차량을 운용하고 부대 지원·정찰 기능 등을 수행하는 '이동식 지휘 센터'로 바뀌는 것이다.
르노 관계자는 "이 설루션은 SUV와 다목적 차량 등 르노의 여러 차량과 호환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르노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경상용차(LCV) '마스터'로 만든 4트루프를 함께 공개하기도 했다.
방산에 뛰어든 자동차 기업은 르노 뿐이 아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드론 방어 기술을 개발하는 독일 스타트업인 타이탄테크놀로지스와 지난 12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벤츠의 오프로드 차량 G클래스와 대형 밴 스프린터는 군용으로 개조돼 타이탄테크놀로지스의 정찰 드론과 요격 드론의 이동식 플랫폼으로 활용된다.
폴크스바겐은 이달 초 독일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픽업트럭 아마록과 밴 크래프터로 만든 군용 차량을 전시하기도 했다. 폴크스바겐은 이미 이스라엘 방산 기업 라파엘과 미사일 방공 시스템인 아이언돔을 탑재한 트럭과 발사대 등의 생산을 추진하고 있다.
이 밖에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지난 16일 록히드마틴과 군수품 협력을 위한 MOU를 체결했고, 스텔란티스 산하 푸조는 이번 유로사토리에서 픽업트럭 랜드트렉의 군용 버전인 랜드트렉 프로텍티드를 전시했다.
자동차 기업들이 최근 방산에 힘을 쏟는 것은 잇따른 전쟁으로 높은 성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미국-이란 전쟁까지 발발하면서 유럽과 중동 지역에서는 재무장 바람이 불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올해부터 2030년까지 방위 예산으로 8000억유로(약 1404조원)를 책정하는 등 각 국이 경쟁적으로 새로운 무기를 사들이고 있다.
반면 자동차 산업은 중국차의 공세 등으로 인해 경쟁이 포화됐고 주요 기업들의 수익성도 크게 떨어진 상황이다.
일부 자동차 기업들은 방산 투자 확대에 따라 생산 계획도 바꾸고 있다. 미국 자동차 전문 매체인 오토모티브뉴스는 "방산 계약이 성사되면 독일에 있는 벤츠 스프린터 공장의 가동 기간이 연장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벤츠는 비용 절감을 위해 스프린터 생산 라인을 단계적으로 폴란드로 이전하고, 독일에서는 2029년에 생산을 완전히 종료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방산 업계도 자동차 기업에 제조를 맡기면 생산 능력을 높일 수 있어 유리하다. 여러 글로벌 방산 업체들은 주문량이 급증하고 있지만, 생산 능력 부족으로 인도 기간이 길어져 어려움을 겪고 있다. 르노의 프랑수아 프로보 최고경영자(CEO)는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데 30년이 걸리는 게 아니라 12개월 안에 해낼 수 있다"며 "이것이 자동차 산업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기아가 특수 차량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기아는 이번 유로사토리에서 경형부터 대형까지 아우르는 특수 차량 라인업을 선보였다. 영하 32도 극저온과 수심 760㎜ 하천 등 극한 조건에서도 주행이 가능한 소형 전술차(KLTV)부터 대규모 화물을 운반하는 대형 표준차까지 다양한 모형이 전시됐다.
기아 관계자는 "앞으로도 군 고객을 위한 맞춤형 모델을 개발해 미래 군용 모빌리티의 비전을 제시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