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기아가 연 100만대를 판매하는 3위 시장인 유럽에서 '이중고'를 겪고 있다.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가성비를 앞세운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PHEV)로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가운데 최근 유럽연합(EU)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무역 장벽까지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30일 유럽 시장조사업체 데이터포스에 따르면 중국 완성차 업체들의 지난달 유럽 시장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4% 급증한 11만2992대를 기록했다. 시장 점유율은 9.8%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BYD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SUV 모델 '씰(SEAL) U DM-i'

상하이자동차(SAIC) 산하 MG의 지난달 판매량은 전년 동월 대비 38% 늘어난 3만66대로 중국 업체 중 1위를 차지했다. BYD는 124% 증가한 2만8186대, 체리자동차는 344% 급증한 2만5656대를 각각 판매했다. 이 밖에 립모터는 423% 증가한 8782대, 지리자동차는 106% 늘어난 8321대를 파는 등 중국 업체들은 고른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달에는 특히 중국산 PHEV의 판매량이 전년 동월 대비 256% 급증한 3만4503대에 달했다. 같은 기간 중국산 전기차의 판매량(3만8281대)과 비슷한 수준에 근접한 것이다. 중국 자동차 업체들은 지난해 초부터 EU가 중국산 전기차에 27%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자, 대상에서 제외된 PHEV 판매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BYD는 지난해 유럽에서 신형 PHEV 모델인 씰 U PHEV를 출시했다. 이 차는 폴크스바겐의 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인 티구안 PHEV와 판매량 1위를 다툴 정도로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씰 U PHEV의 독일 내 판매 가격은 3만9990유로로 티구안보다 1만유로 싸다.

이 밖에 BYD는 올해부터 소형 SUV인 아토 2 PHEV를 팔고 있으며, 체리자동차도 주력 PHEV 모델인 제쿠7을 앞세워 유럽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현대차 싼타페. /현대차 제공

중국 업체들이 유럽에서 고속 성장하고 있는 반면 현대차는 PHEV 판매가 오히려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현대차는 유럽에서 투싼과 싼타페 PHEV를 판매 중이다. 기아는 스포티지와 쏘렌토, 니로 PHEV를 판매하고 있지만, 파워트레인을 구분해 판매량을 공개하진 않는다.

투싼 PHEV의 지난달 판매량은 1년 전(1890대)보다 21.8% 감소한 1477대, 싼타페 PHEV는 1년 전(450대)보다 0.4% 증가한 452대였다. 올 들어 누적 판매량을 보면 투싼 PHEV는 5720대로 5.6% 늘었지만, 싼타페 PHEV는 1913대에 그쳐 13.5% 감소했다.

현대차·기아는 전기차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로 PHEV 대신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를 채택했다. EREV는 배터리를 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차량으로 내연기관 엔진이 있지만, 배터리를 충전하는 데만 사용된다. 반면 PHEV는 엔진을 주 동력원으로 사용한다.

현대차는 올해 말까지 제네시스 GV70과 싼타페 등을 시작으로 EREV 모델을 내놓을 계획이지만,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는 중국이나 유럽 완성차 업체들이 PHEV를 앞세워 전기차를 제외한 친환경차 시장을 선점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EU가 추진하는 산업가속화법(IAA)도 현대차·기아에 악재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IAA는 배터리를 제외한 전기차 부품 70% 이상을 유럽산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지난 3월 초안이 공개됐다.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의 상당 물량은 유럽에서 판매되고 있는데, 이 법이 정식 발효되면 앞으로 수출이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유럽 시장에서 104만2509대를 판매했다. 이 가운데 43.6%인 45만4347대가 국내에서 생산돼 수출됐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이 지난달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콘래드 호텔에서 열린 '2026 세마포 월드 이코노미' 미래 모빌리티 트랙 세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현대차·기아 제공

현대차그룹은 현지 생산 비중을 높여 IAA에 대응할 방침이다. 현재 가동 중인 체코와 슬로바키아, 터키 공장을 활용해 현지 생산을 늘리고, 현지에서 부품을 조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유럽이나 일본, 미국 등의 경쟁사와 비교하면 현대차·기아가 전기차 분야에서 앞선 경쟁력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중국 업체들의 발전 속도는 이보다 빠르다"며 "빠른 시기에 효과적인 대응책을 가동하지 못할 경우 유럽 판매량이 앞으로 100만대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