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현지시각)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소도시 크루에 있는 벤틀리 공장. 자동차 시트 공정으로 들어서니 '드르륵, 드르륵' 경쾌한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를 채웠다. 수십 가지 색상의 실패가 놓인 작업대 앞, 직원들은 시트에 스티치를 한 땀 한 땀 새겨 넣고 있었다. 로봇 팔이 분주히 움직이는 일반 자동차 공장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광경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각 직원이 만들고 있는 시트의 소재와 색상은 물론, 스티치 모양까지 모두 제각각이라는 점이었다.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소도시 크루에 있는 벤틀리 공장. 1000명의 직원이 연간 700대를 생산한다./이윤정 기자

롤스로이스, 마이바흐와 함께 '세계 3대 명차'로 꼽히는 벤틀리는 영국 최고급 수공 자동차 회사다. 세계 여러 곳에 생산 기지를 두고 있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벤틀리의 모든 차는 이곳 크루 공장에서만 태어난다. 1000명의 직원이 일하는 이 공장의 연간 생산량은 700대에 불과하다. 웨인 브루스 벤틀리 디렉터는 "영국 인기 차종인 닛산 '캐시카이' 한 대를 만드는 데 5시간이면 충분하지만, 벤틀리 차량에는 그 10배에 달하는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이처럼 생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대부분 공정이 사람 손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로봇은 '로미오'와 '줄리엣' 단 두 대에 불과하다. 10년 전 도입된 이 로봇들은 각각 인테리어 패널 페인트칠과 윈드스크린 장착 임무만 맡고 있다. 브루스 디렉터는 "이 두 가지 작업을 제외하곤 전부 수작업"이라며 "로봇을 더 많이 투입하면 비용은 줄겠지만, 이는 '수공예'라는 브랜드 정체성과 맞지 않고 고객이 원하는 방향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 인테리어 소재부터 시트까지 취향대로… 수작업의 '산업화'

벤틀리가 수작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업계 최고 수준의 개인화 프로그램인 '뮬리너'의 구현을 위함이다. 벤틀리 고객은 인테리어에 쓰이는 소재부터 자신의 취향을 자유롭게 반영할 수 있다. 이날 만나본 가장 고가의 원목 패널은 5500년 된 오크나무에서 추출한 것이었다. 고객은 이 위에 원하는 색상을 입혀 차량 내 대시보드를 꾸밀 수 있다. 소재의 한계는 없다. 돌이나 카본 등을 고를 수도 있다. 최근 시트 소재로는 '친환경 가죽'을 사용해 달라는 요구까지 등장했다.

벤틀리 고객이 대시보드 가니시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소재 중 일부. 5500년된 나무에서 추출된 소재(맨 왼쪽)부터 돌을 얇게 펴낸 소재까지 다양하다./이윤정 기자

프랑크-슈테판 발리저 벤틀리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인터뷰에서 "벤틀리를 사양화하는 과정은 단순한 거래가 아니다"라며 "고객은 크루 공장을 직접 방문해 디자이너들과 마주앉아 소재를 보고, 차량 사양을 하나하나 구성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 고객은 공장을 둘러본 뒤 즉석에서 50만달러(약 7억6000만원) 상당 옵션을 추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발리저 CEO는 "네 번에 걸쳐 사양을 갈아엎고 재구성하는 고객도 있었는데, 이 모든 과정이 즐거움"이라고 했다.

시트 가죽과 마감 선택까지 끝나면, 고객은 엔진과 차체가 결합하는 '엔진 메리지(Marriage·결혼)' 공간으로 이동한다. 자신이 주문한 차량이 제대로 제작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벤틀리는 폴크스바겐에서 주문 제작해 조달한 엔진과 차체를 직접 조립한다. 이날 작업대 위에서는 대형 세단 '플라잉스퍼'의 4.0L V8(8기통) 엔진이 차체를 만날 준비에 한창이었다. 브루스 디렉터는 "모든 부품마다 고객의 이름표가 붙어 있다"고 말했다.

벤틀리는 이러한 까다로운 개인 맞춤화 과정을 전통 공방 방식에 가두지 않고 '산업화'했다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발리저 CEO는 "크루 공장은 정밀하게 정의된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고도로 산업화된 프리미엄 생산 시설"이라며 "적합한 장인 정신이, 적합한 차량에, 적합한 색상으로, 적합한 타이밍에 적용돼 최종적으로 완성도 높은 차량을 만들어내는 구조"라고 했다.

벤틀리의 시트를 점검하고 있는 직원. 벤틀리는 시트 가죽 재단부터 스티치까지 대부분 공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한다./벤틀리 제공

◇ 전동화 맞춰 공장 대규모 투자… "장인정신과 디지털화 함께 작동"

벤틀리 고객의 개인화 요구는 갈수록 고도화하고 있다. 이에 벤틀리는 뮬리너를 넘어서는 개인 맞춤화 단계를 공식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발리저 CEO는 "지난 5년간 차량 한 대당 적용되는 개인화 사양의 규모가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더 높은 단계의 개인 맞춤화를 공식화할 필요성이 충분히 존재한다"며 "높은 수준의 수요와 열정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에 대응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벤틀리가 장인정신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동화라는 흐름에 맞춰 과감히 공장을 개조하고 있다. 벤틀리는 오는 9월 브랜드 최초의 순수 전기차를 공개하기 위해 크루 공장 내 가장 오래된 건물 'A1'에 생산 라인 세 개를 마련하는 등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여기에 신규 디자인 센터와 통합 물류 센터, 최첨단 도장 공장도 새로 갖췄다.

발리저 CEO는 "크루 공장에서는 장인정신과 디지털화가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 아니고, 하나의 유기적 시스템 안에서 함께 작동하고 있다"며 "배터리 생산 시스템, 제조 방식, R&D 과정에서 차량에 축적되는 데이터 흐름 등 모든 측면에서 완전히 업그레이드됐고, 매우 현대적이고 진보적 수준에 도달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벤틀리를 '벤틀리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들은 여전히 차량 안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이 균형이 결코 깨지지 않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