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의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벤테이가'는 2015년 출시와 함께 초호화 SUV 시장을 개척한 기념비적 모델이다. 3억원대부터 시작하는 높은 가격으로 자산가들의 패밀리카 수요를 흡수하며 롤스로이스 '컬리넌', 람보르기니 '우루스' 등의 등장을 이끌었다. 벤틀리 역사상 최다 판매를 기록 중인 이 모델의 부분변경 모델이 지난 3월 출시됐다. '더 뉴 벤테이가 스피드'를 벤틀리 본사가 있는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크루에서 직접 시승해 봤다.
벤테이가는 초호화 SUV이지만 '쇼퍼 드리븐(Chauffeur-driven·수행 기사가 운전하는)' 차량이 아닌 '오너 드리븐(Owner-driven·직접 운전하는)' 차량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운전 경험에 그만큼 신경 썼다는 뜻이다. 실제 운전해보니 페달이 가볍고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순식간에 속도가 치솟는데도 공차 중량이 2466㎏에 달하는 만큼 떨림이나 붕 뜨는 현상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한 성능은 새로운 엔진 덕이 크다. 6.0L 12기통(W12) 엔진에서 4.0L 8기통(V8) 트윈터보 엔진으로 바뀌었다. 배기량과 실린더가 축소되면서 엔진이 밀어내는 폭발적인 힘, 즉 최대 토크가 91.8㎏·m에서 86.7㎏·m으로 소폭 줄었다. 대신 몸집이 가벼워지면서 최고 출력이 626마력에서 650마력으로 향상됐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3.9초에서 3.6초로 0.3초 단축됐다.
더 뉴 벤테이가 스피드엔 벤틀리 최초로 23인치 휠이 옵션으로 제공되는데, 이를 선택하면 양산차 중 가장 큰 440㎜ 카본 세라믹 브레이크 디스크가 장착돼 시속 310㎞까지 속도를 낼 수 있다. 이는 벤틀리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다.
SUV임에도 노면이 잘 읽힐 정도로 움직임이 다이내믹한 편이었지만, 컴포트 모드에서는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스포츠 모드로 설정하면 댐퍼가 15% 더 단단해진다. 이 때문에 움푹 패인 곳이나 과속 방지턱을 넘을 때 충격이 훨씬 더 강하게 올 수 있다. 컴포트 모드와 스포츠 모드의 중간을 원한다면 'B(벤틀리)' 모드를 추천한다. 운전자의 조작과 노면 상태에 맞춰 차량의 특성을 조절해 준다.
스포츠 모드의 또 다른 특징은 배기음이다. 저속에서는 거칠게 표효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적당히 점잖은 저음이 난다. 이러다 속도가 붙으면 벤틀리답지 않게 반항적이면서 우렁찬 배기음이 울린다. 갑자기 속도를 줄이면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유쾌한 '파팍' 소리가 난다. 보다 박진감 넘치는 배기음을 원한다면 '아크라포비치 티타늄' 배기 시스템 옵션을 선택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V8 엔진의 드라마틱한 파워를 청각적으로 더욱 강조해주는데, 테일파이프가 네 개나 된다.
시승 도로는 구불구불하면서도 회전 교차로가 많은 곳이었다. 그만큼 코너링 성능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 차체에 비해 다소 좁아 보이는 공간에서도 잘 회전했다. 급제동이 필요한 순간은 많지 않았다.
이는 코너링 시 차량 안쪽 바퀴에 미세하게 제동을 걸어주는 '브레이크 벡터링' 시스템 덕이다. 컴퍼스가 중심축을 찍고 돌리는 것처럼, 안쪽 바퀴가 순간적으로 감속하면서 육중한 차체가 날카롭고 민첩하게 파고들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날 체험해보진 못했지만, 스포츠 모드에서는 다이내믹 ESC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다. 자세제어장치 개입이 완화돼 운전자의 의도에 따라 드리프트나 오버스티어를 구현할 수 있다. 정지 상태에서 미끄러짐 없이 최대 가속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런치 컨트롤' 기능도 있다.
더 뉴 벤테이가 스피드의 전면부엔 각진 벤틀리 특유의 그물망 그릴이 중심을 잡고 있다. 양옆 헤드램프는 이전보다 살짝 눌린 타원형으로 바뀌었다. 날렵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지만, 테두리가 다소 밋밋하다 보니 오히려 귀여운 느낌에 가까워 중후한 벤틀리 그릴과는 겉도는 느낌이 다소 든다.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측면부는 속도감을 느낄 수 있도록 어깨선과 무릎선, 발목선이 날카롭게 서 있다. 후면 리어램프의 색상도 바뀌었다. 이전 모델은 램프 커버 자체가 붉은색이었지만, 이번 모델은 투명한 커버에 내부 구조물을 드러내 고급스러운 화이트 크리스털 느낌을 줬다.
시트와 도어 이너 패널의 가죽에는 스피드 전용 '프리시전 다이아몬드' 퀼팅 디자인이 적용됐다. 여기에 벤틀리는 시트와 대시보드 가니시 등을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다. 최고급 원목과 같은 소재는 물론 색상, 스티치, 자수도 원하는 대로 가능하다. 센터 디스플레이는 크지 않고, 물리 버튼이 오히려 많은 편이다. 고급스럽게 처리돼 있고 사용하기도 직관적이다.
2열의 경우 고급 세단처럼 각 시트마다 앞뒤 공간은 물론 등받이와 머리 받침까지 각도 조절이 가능했다. 키가 170㎝인 여성에겐 넉넉했지만, 180㎝ 중반 남성이 앉으니 무릎 공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트렁크 용량은 4인승 392L, 5인승 484L다. 공식 판매 가격은 3억3300만원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