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4시 현대차의 한 지역본부에 본사 국내사업본부로부터 이 같은 다급한 지시가 내려왔다. 모든 매장에서 1년 넘게 전시돼 있는 주력 판매 모델을 갑작스럽게 빼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본사 담당자는 "그룹 최고 경영진의 결정"이라며 별다른 이유를 대지 않았고, 신속히 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강도 높은 인사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사에서 내려온 지시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이날 전국의 현대차 차량 대기장에서 각 영업점의 고객에게 인도될 팰리세이드 역시 출고가 멈췄다. 본사에서는 출고를 중단한 이유 역시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문은 다음날인 14일 오전이 돼서야 풀렸다. 로이터 등 여러 외신은 현대차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팰리세이드의 일부 모델에 대해 판매 중단과 자발적 제품 수거(리콜)를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에서 전동시트와 관련된 사망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 美 판매 팰리세이드서 전동시트 끼임 사고 발생
17일 현대차와 외신에 따르면 팰리세이드의 결함은 뒷좌석의 전동시트에서 발생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 오하이오주(州)에서 2세 아동이 접히는 전동시트에 끼여 사망했다. 전동시트가 접힐 때는 좌석에 사람이 있을 경우 차가 이를 감지해 작동을 멈춰야 하지만, 팰리세이드는 이 같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사망 사고가 발생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번 사망 사고의 구체적인 경위는 아직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다. 로이터는 현대차가 "아직 사고의 전말을 규명하지는 못했고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입장만 밝혔다고 전했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 역시 이번 사고와 관련해 논평을 내지 않았다.
미국에서 일부 블로거는 3열에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차 관계자는 "이번 사고는 북미 조직에서 조사를 진행 중이며, 아직 정확한 사고 이유나 경위는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선을 그었다.
팰리세이드는 현대차의 주력 대형 SUV다. 지난 2018년 12월 첫 선을 보였으며 현재 판매 중인 차량은 지난해 1월 출시된 2세대 모델이다. 1세대 팰리세이드가 2022년 4월 부분변경(페이스리프트)을 거친 후 불과 2년 8개월 만에 완전변경 모델로 출시된 것이다.
팰리세이드의 일부 상위 트림에는 2열과 3열을 버튼으로 접을 수 있는 전동시트가 탑재된다. 3열 뒤 적재 공간 좌측에 위치한 버튼을 누르면 2열과 3열 중 좌석을 선택해 시트를 접을 수 있다.
북미 시장은 팰리세이드 리미티드 트림과 캘리그래피 트림, 국내에서는 캘리그래피 트림에 이 기능이 기본사양으로 들어간다. 국내의 경우 캘리그래피 바로 아래 등급인 프레스티지 트림에 전동시트 기능이 옵션으로 포함된다.
전동식 폴딩 시트는 최근 여러 브랜드의 SUV 차량에 탑재되고 있다. 포드의 익스플로러와 제너럴모터스(GM)의 트래버스, 도요타의 그랜드 하이랜더 등이 상위 트림에 이 기능이 들어간다. 현대차의 경우 팰리세이드 외에도 싼타페, 아이오닉9 등이 전동시트 기능을 제공한다. 팰리세이드와 동일한 플랫폼으로 제작되는 기아의 북미 판매 차량인 텔루라이드도 이 기능이 탑재돼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동일하게 전동식 폴딩 시트가 탑재돼도 모델들마다 작동 방식이나 원리가 다르다"며 "현재 팰레세이드 외에는 결함이 발견된 차량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내부서 제기된 경영진 책임론… "충분한 개발·검증 시간 안 줘"
사고 이후 직장인 커뮤니티에는 남양연구소 등 연구개발(R&D) 조직 근무자 등을 중심으로 경영진의 책임을 지적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한 현대차 직원은 "차량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시험 차량을 축소해 전체 사양에 대한 검증을 못한 게 결함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다른 직원은 "충분한 개발 기간이 보장되지 않았고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적용했다"며 "무리하게 신기술 사양을 적용하도록 강행한 상품영업본부의 책임이 크다"는 글을 올렸다.
일부 R&D 직원들은 특히 경영진이 팰리세이드의 SOP(Start of Production) 기간을 단축한 점을 문제삼기도 했다. SOP란 신차의 개발이 완료된 후 대량 생산을 하기 전 각 기능을 최종 검증하기 위한 초도 양산 절차를 이르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문제점을 세세히 파악하기 위해 충분한 SOP 과정을 거쳐야 함에도 경영진이 신형 팰리세이드의 출시 시점을 앞당기면서 이번 전동시트 결함을 잡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 '효자 모델' 판매 중단… 현대차 실적 개선, 비상등 켜져
팰리세이드는 최근 판매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는 현대차의 몇 안 되는 '효자 모델' 중 하나다. 현대차는 올 들어 지난달까지 누적 판매량이 9만7216대로 전년 동기 대비 5.9% 줄었지만, 팰리세이드는 8075대로 26.9% 증가했다.
특히 여러 옵션을 갖춘 대형 SUV인 만큼 다른 차종에 비해 수익성이 높아 현대차가 실적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이 차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현대차의 대표 인기 모델로 꼽혔다. 팰리세이드의 지난해 글로벌 판매량은 21만1215대로 전년 대비 27.4% 늘었다. 이는 2018년 첫 출시 이후 역대 최고 판매 실적에 해당된다. 지난달에는 '2026 북미 올해의 차' 유틸리티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대차는 팰리세이드의 이번 전동시트 사망 사고로 북미 시장에서 7만4964대의 차량을 리콜하겠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도 5만7474대가 포함돼 두 나라에서만 리콜 차량은 총 13만2000여대에 이를 전망이다.
당분간 전동시트 탑재 트림의 판매도 중단될 예정이라 현대차가 올해 판매 목표치를 달성하는데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다만 금융 시장에서는 리콜에 따른 비용 손실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신증권은 16일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OTA)를 통해 조기에 기능을 개선할 경우 실적과 기업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완성차 업계에서는 전동시트 결함에 대한 우려가 계속 나왔음에도 제 때 이에 대해 대응하지 않다가 결국 사망 사고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현대차의 브랜드 가치가 훼손되는 일은 피하기 어려워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완성차 업계 한 관계자는 "팰리세이드의 전동시트가 2·3열의 탑승자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채 접힌다는 지적은 이미 1년 전부터 국내, 해외 유튜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차는 계속 이를 묵살하고 있다가 결국 사망 사고와 리콜, 판매 중단으로 이어졌다"며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성이 크게 떨어지게 됐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