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이 사장단·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그룹 전체 사업과 투자의 밑그림을 그릴 기획조정 부문과 연구개발(R&D), 제조 부문에서의 리더십을 재정비한 점이 눈에 띈다. 다만 최근 성과가 부진한 자율주행 기술 개발을 이끌 새 적임자 선정은 이번 인사에서 제외됐다.
현대차그룹은 18일 소프트웨어 중심 모빌리티 기업으로의 전환을 가속화 하기 위해 R&D와 핵심 기술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인사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신임 R&D 본부장으로 임명된 만프레드 하러 사장을 비롯해 정준철 현대차·기아 제조부문장, 윤승규 기아 북미권역본부장 겸 기아미국 법인장, 이보룡 현대제철 대표이사 등 4명이 각 조직의 수장(首長)으로 임명되면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 기획조정 담당에 서강현 현대제철 사장… 장재훈 부회장과 역할 분담
이번 인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현대차그룹 내 대표적인 재무통(通)으로 꼽히는 서강현 현대제철 사장을 신임 기획조정 담당으로 임명한 점이다. 이는 올해 미국의 고율 관세 등으로 인해 악화된 수익성을 개선하면서 여러 신규 사업에서 투자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서 사장은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2013년 경영관리실장(이사대우)으로 임원 생활을 시작한 이후 현대차 회계관리실장(상무), 재경본부장(전무), 기획재경본부장(부사장) 등을 거쳤다.
현대차그룹 기획조정 담당은 그룹 전체 사업의 밑그림을 그리고 인사와 재무, 투자 등을 총괄하는 핵심 보직이다. 과거 정몽구 회장 시절 그룹 '2인자'였던 김용환 전 부회장과 당시 재무통으로 꼽혔던 김걸 전 사장 등이 이 역할을 했다. 지난해 말부터는 장재훈 완성차 담당 부회장이 기획조정 담당 업무를 함께 해 왔다.
재무 전문가인 서 사장이 기획조정 업무를 전담하면서 장 부회장은 완성차 사업과 수소 모빌리티 등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완성차 사업은 미국에서의 실적 회복은 물론 유럽, 중남미, 동남아 등에서 중국 업체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과제도 안고 있다.
서 사장이 사업과 투자의 실무 총괄 업무를 가져감에 따라 현대차그룹은 장 부회장을 중심으로 완성차 사업에 더 전력을 기울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 신임 R&D 본부장은 외국인… 美 제철소 짓는 현대제철은 '기술통'
남양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현대차그룹의 R&D 부문을 이끌 새로운 수장은 독일 국적의 만프레드 하러 사장이 맡는다. 그는 25년 간 아우디와 BMW, 포르셰 등 독일 완성차 업체에서 섀시와 소프트웨어 등의 개발을 담당했던 인물로 지난해 5월 현대차그룹에 합류했다.
하러 사장 선임은 완성차의 기술력을 독일 고급 브랜드 수준으로 높이면서 동시에 소프트웨어와 모빌리티의 효율적인 결합을 이끌 적임자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애플에서 자율주행 전기차(애플카) 개발에도 참여하는 등 모빌리티 관련 IT 산업에서도 역량을 발휘했던 이력이 있다.
현대차그룹도 이번 선임 배경에 대해 "소프트웨어를 비롯한 모든 유관 부문과의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 SDV(Software-Defined Vehicle·소프트웨어 정의 차량) 사업에서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인사였다"고 설명했다.
서 사장이 기획조정 담당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새로 현대제철을 이끌 대표이사 사장으로는 이보룡 생산본부장이 임명됐다. 서 사장이 재무통이라면 이 사장은 철강 생산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기술통으로 꼽힌다.
이 부사장은 1965년생으로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후 현대차그룹의 강관 제조 계열사였던 현대하이스코에 입사했다. 현대하이스코가 2015년 현대제철에 흡수합병된 후에는 현대제철 냉연생산실장, 생산기술실장, 연구개발본부장 등을 거쳤다. 올해 초 판재사업본부장으로 임명됐던 이 부사장은 지난 7월 생산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대제철은 포스코와 손잡고 미국에 총 58억달러(약 8조6000억원)를 투자해 연산 270만t(톤) 규모의 신규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 부사장은 철강 사업의 구조와 기술력, 생산, 판매 등을 두루 이해하고 있는 만큼 미국에서의 제철소 건설과 제품 기술력 향상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정준철 사장으로 제조 부문의 리더를 교체한 점도 눈에 띈다. 그는 생산 구조를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바꾸고 로보틱스 등 그룹의 차세대 생산 체계 구축에 주력할 예정이다. 정 사장은 완성차 생산 기술을 담당하는 제조솔루션본부와 수익성·공급망 관리의 핵심인 구매본부를 총괄해 온 만큼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생산 체계를 변화 시킬 적임자라는 평가가 나온다.
◇ 송창현 前 사장 후임 선정 못해… 자율주행 고민 지속
이번 현대차그룹 인사를 앞두고 완성차 업계의 관심은 첨단차플랫폼(AVP) 본부장 겸 포티투닷 대표를 맡았던 송창현 전 사장의 후임이 누가 될 것인 지에 쏠렸었다. 송 사장은 기술 개발에서의 저조한 성과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날 인사에서 송 전 사장을 이어 자율주행 기술 개발을 이끌 다음 리더는 결국 포함되지 않았다.
최근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 경쟁사들이 이미 완전한 형태에 가까운 자율주행 차량을 상용화하고 있는 반면 현대차·기아는 아직 원천기술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테슬라는 이미 2020년부터 미국에서 완전자율주행 기술인 FSD(Full Self-Driving)를 상용화했으며, 지난달부터는 국내에서도 이 기능이 적용된 모델S와 모델X를 판매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송 전 사장의 후임 인선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서 단기간에 성과를 낼 만한 적임자를 국내·외에서 찾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내부 조직도 어수선한 상황이라는 이유에서다.
현대차그룹의 R&D 조직은 지난 2023년 당시 최고기술책임자(CTO)였던 김용화 전 사장이 퇴임한 이후 총괄 컨트롤타워가 사라진 상태다. 대신 양산차 개발은 R&D 본부가, 자율주행을 포함한 모빌리티 소프트웨어 분야는 AVP 본부가 맡는 방식으로 양분돼 있다. 또 자율주행 기술 개발은 AVP 본부 외에 미국 자회사인 모셔널도 담당 중이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이 자율주행 분야에서 신속하게 테슬라 등을 따라잡기 위해선 새로운 수장이 기술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며 "특히 AVP 본부와 모셔널의 역할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 지에 대해 먼저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