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의 옛 한국전력(015760) 본사 부지에 통합 사옥을 건설하려는 현대차(005380)그룹의 글로벌비즈니스콤플렉스(GBC·Global Business Complex)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원안대로 100층 이상의 초고층 빌딩을 세우라는 서울시, 강남구청과 설계 변경을 통해 실리를 취하겠다는 현대차그룹이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18일 재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올해 24조3000억원을 국내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지난 9일 밝혔다. 이는 지난해 투자액 20조4000억원보다 19% 넘게 늘어난 수치로 연간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국내 투자는 ▲연구개발(R&D) 투자 11조5000억원 ▲경상 투자 12조원 ▲전략 투자 8000억원으로 나뉘어 집행된다. R&D 투자는 차량 전동화와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Software Defined Vehicle), 수소전기차 등 신기술 개발에 쓰인다. 경상 투자는 전기차 전환과 생산 시설·인프라 확대 등에 투입된다. 전략 투자 역시 자율주행과 소프트웨어(SW), 인공지능(AI) 등 핵심 미래 사업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쓰일 예정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현대차그룹 GBC 부지. 2020년 착공했지만, 터파기만 진행한 채 방치돼 있다. /권유정 기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 현대차그룹 GBC 부지. 2020년 착공했지만, 터파기만 진행한 채 방치돼 있다. /권유정 기자

현대차그룹은 계열사별 투자 계획도 발표했는데, GBC 사업은 거론되지 않았다. GBC 사업을 주도하는 건설 부문은 올해 수전해 수소 생산 실증 사업과 소형 모듈 원전, 신재생에너지, 전기차 인프라 구축 등에 투자를 집중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014년 10조5000억원을 투입해 당시 한전 본사가 있던 삼성동 땅을 매입했다. 100층 이상의 초고층 빌딩을 지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계열사가 입주할 통합 사옥으로 쓰겠다는 게 당시 그룹을 이끌던 정몽구 회장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후 정의선 회장이 취임하면서 기류가 바뀌었다. 공사 기간이 오래 걸리고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초고층 빌딩을 올리는 대신 낮은 층수의 건물로 나눠 건설하는 쪽으로 계획을 바꾼 것이다. 정의선 회장은 사옥 건설보다 전기차, 자율주행차, AI 등 신기술 개발에 투자하며 실리를 취하기를 원했다.

현대차그룹의 이 같은 결정은 서울시와 강남구청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지난 2020년 착공에 들어가 터파기 공사를 진행해 왔던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55층 2개 동으로 변경된 GBC 설계안을 발표했지만, 서울시는 원안을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서울시는 초고층 빌딩 건설을 전제로 토지 용도 변경과 용적률 완화 등 여러 인센티브를 제공했던 점을 거론하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5월 55층 2개 동으로 건설하는 내용의 GBC 설계 변경안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 계획에 대해 서울시는 원안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현대차그룹 제공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5월 55층 2개 동으로 건설하는 내용의 GBC 설계 변경안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 계획에 대해 서울시는 원안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현대차그룹 제공

현대차그룹과 서울시는 지난해 7월 GBC 설계 변경안을 놓고 추가 협상을 진행하기로 합의했지만,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11월 선임된 장재훈 현대차 부회장이 GBC 담당을 겸직해 사업을 추진하는 데 힘이 실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지만, 한 달 만에 GBC 담당 조직이 폐지되면서 이 같은 기대도 사라졌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최근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둔화)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등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그룹의 투자가 신기술 개발과 인프라 확충 등에 집중되고 있다”며 “GBC 사업에 대해서는 그룹 수뇌부의 관심이 줄어든 분위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