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영국의 작은 도시 밀턴 킨즈(Milton Keynes). 영국 수도 런던과 두 번째로 큰 도시 버밍엄 사이에 있는 밀턴 케인즈에는 자동차 헤드업디스플레이(HUD·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정보를 제공하는 디스플레이. 앞 유리에 속도 등이 표시된다)에 적용되는 홀로그램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엔비식스(Envisics) 본사가 있다.

설립한 지 15년이 된 엔비식스는 업력이 길지 않지만, 영국에 뿌리를 둔 재규어랜드로버를 비롯해 현대차(005380)그룹, 미국 제너럴모터스(GM) 등 굵직한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협력하는 강소기업이다.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제이미슨 크리스마스(Jamieson Christmas) 최고경영자(CEO)가 창업한 엔비식스는 2015년 2월 처음 재규어랜드로버 차량에 자사 홀로그램 HUD를 장착한 이후 지금까지 15만대 이상에 제품을 탑재했다.

엔비식스 홀로그램 기술이 적용된 헤드업디스플레이 화면./엔비식스 제공

영국 엔비식스 본사에서 만난 크리스마스 CEO의 안내에 따라 엔비식스 홀로그램 증강 현실(AR) HUD가 탑재된 운전석 데모에 앉았다. 좁은 이면도로를 지날 때 양 옆에 주차된 차들 사이에 선명한 빨간 눈동자 표시가 떴다.

이 표시를 주시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주행하자 주차된 차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보행자가 나타났다. 3차선 고속도로에서 우측 톨게이트로 빠져야 할 땐 이동해야 할 도로 위에 입체적인 파란색 화살표가 나왔고, 도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건물은 이 지역에 유명한 유적지라고 안내됐다. 크리스마스 CEO는 낮인지 밤인지, 해가 강한지 비가 오는지, 시간이나 날씨가 달라도 홀로그램이 왜곡되거나 시야를 방해하는 요소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의 목표는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세상과 상호작용 하는 방식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라며 “홀로그램 HUD는 운전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현실에 입혀(overlay) 주행 안전성을 높이고 운전자가 다양한 정보를 기반으로 판단하도록 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엔비식스 창업자이자 CEO인 제이미슨 크리스마스 박사./연선옥 기자

◇ 제품 크기 줄이고 이미지 품질 높인 HUD

엔비식스는 지난해 현대모비스(012330)가 참여한 시리즈C 자금조달에서 5000만달러(약 710억원)를 유치한 이후 기업가치가 5억달러로 평가됐다. 현대모비스는 2020년에도 엔비식스에 2500만달러를 투자했는데, 시리즈C에는 재규어랜드로버 모회사인 스텔란티스와 벤처캐피탈 인모션벤처스도 참여했다.

엔비식스 기술이 주목받는 이유는 경쟁사 제품보다 작은 디스플레이에 훨씬 품질 좋은 이미지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CEO는 “독점 알고리즘을 이용해 훨씬 간단하고 견고한 광학 장치와 결합해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만든다. 더 큰 배율, 뛰어난 이미지, 여러 거리에서 동시에 표시되는 이미지가 우리 제품의 특성”이라고 말했다.

기존 기술은 영상을 투사할 때 빛의 90% 이상을 열에너지 등으로 낭비하지만 엔비식스의 알고리즘과 고배율 설계를 갖춘 홀로그래픽은 필요한 곳에 정확하게 빛을 재분배해 이미지를 더 또렷하게 구현한다. 덕분에 전력 소모도 줄일 수 있다. 특히 작은 크기의 제품은 고객사인 완성차 업체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차에 설치되는 HUD는 에어컨이나 다른 인포테인먼트 기기와 내부 공간을 나눠 써야 해 크기는 작고 무게는 가벼워야 탑재하는 게 수월하다.

엔비식스는 완성차 업체의 요구에 따라 제품을 유연하게 변신시킨다. 어떤 업체는 얇고 넓은 이미지를, 어떤 업체는 정사각형 이미지를 원한다. 크리스마스 CEO는 “우리 과제는 각 제조업체의 다양한 요구에 맞춰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라며 “엔지니어와 과학자로 구성된 팀이 맞춤형 설루션을 찾아간다”고 했다.

엔비식스의 2세대 기술이 탑재된 홀로그램 헤드업디스플레이(왼쪽 아래). 운전자 앞 유리창에 다양한 정보가 표시된다./연선옥 기자

◇ “홀로그램 응용 분야, 자동차 외에도 무궁무진”

엔비식스의 등장에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은 세계적인 고전 영화 ‘스타워즈’다. 영화에서 레이아 공주는 로봇 R2D2가 쏘는 광선을 이용해 홀로그램 메시지를 전달한다. 영화에서 나온 동적(Dynamic) 홀로그램은 많은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줬는데 크리스마스 CEO도 그중 한 명이었다.

크리스마스 CEO가 어린시절을 보낸 1970년대는 공상과학 영화가 처음 특수 효과를 사용한 시기다. 그는 어린 시절 스타워즈를 보면서 첨단 기술에 매료됐고, 홀로그램으로 소통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도 언젠간 저런 기술을 구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과학, 전자공학, 컴퓨터공학, 물리학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케임브리지대 박사 과정에선 공상 과학 영화 속 디스플레이 기술을 실현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고, 이 연구는 홀로그램 플랫폼 기술의 기초가 됐다.

이를 바탕으로 크리스마스 CEO는 투트리스포토닉스(Two Trees Photonics)를 설립했다. 이후 투트리스포토닉스는 2015년 미국 AR 웨어러블 회사 다큐리(DAQRI)에 인수됐고, 2017년에는 홀로그램·자동차 엔지니어링 팀이 다큐리에서 분리돼 2018년 1월 독립 법인 엔비식스가 설립됐다.

제이미슨 크리스마스 CEO가 제품을 설명하는 모습./연선옥 기자

엔비식스는 재규어랜드로버를 첫 번째 고객으로 맞았다. 이날 엔비식스가 공개한 HUD에는 2세대 기술이 적용됐는데, 2세대 기술은 GM 고급 브랜드 캐딜락의 전기차 ‘리릭’에 탑재될 예정이다. 엔비식스는 3~4세대 기술을 개발 중이다. 3세대 기술은 내년 1월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IT·전자 전시회 CES에서 공개된다. 크리스마스 CEO는 “차세대 제품에는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 적용됐다. 이 기술이 가져올 변화는 믿기 힘들 정도로 크다고 장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엔비식스의 홀로그램은 자동차에 주로 쓰이지만, 다른 분야에도 접목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 CEO는 “아직 얘기할 단계는 아니다”라면서 “자동차 외 다른 분야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고, 공개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유럽과 북미 중심인 사업은 아시아로도 확대할 계획이다. 크리스마스 CEO는 “중요한 전략적 투자자이자 파트너인 현대모비스와 함께 일하는 건 큰 행운”이라고 말했다.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글로벌 부품회사 콘티넨털 외에 엔비식스에 투자한 현대모비스도 직접 HUD를 만든다. 크리스마스 CEO는 “HUD 생산 능력으로만 보면 관련된 모든 기업이 경쟁사이지만, 기술 측면에서는 이들과 독립돼 있다”며 “경쟁을 통해 기술을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고, 최종 목표(The end game)에 더 일찍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