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폭스바겐그룹은 니켈·코발트·리튬 같은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캐나다 정부와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지난 21일부터 사흘간 캐나다를 방문 중인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이런 내용의 계약서에 곧 서명할 예정이다. 폭스바겐그룹은 그동안 중국산 원료를 많이 사용했는데, 캐나다로부터 많은 광물·소재를 공급받으면 중국 의존도가 낮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이번 계약은 북미 지역에 있는 폭스바겐 생산 시설의 공급망을 안정화하고, 미국 정부가 새로 마련한 세금 규정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분석했다. 블룸버그가 언급한 새로운 세금 규정이란 미국 정부가 최근 시행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16일 내년부터 배터리 원산지를 규제하는 이 법에 서명했다.
인플레 감축법에 따르면 내년부터 미국에서 전기차 보조금 7500달러의 절반(3750달러)을 받으려면 리튬, 니켈과 같은 배터리 핵심 자재를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공급받아야 한다. 나머지 보조금 절반은 북미에서 제조되는 배터리의 주요 부품(양극재·음극재 등) 비율이 50% 이상이어야 받을 수 있다. 2024년부터는 중국의 배터리 부품, 2025년부터는 중국 배터리 광물의 사용이 전면 금지된다. 또 해당 법이 시행되면서 당장 미국에서 판매 중인 전기차의 70%가 북미 밖에서 조립된다는 이유로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탈락했다.
미국 정부가 배터리를 생산할 때 중국산 원료를 사용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고, 전기차 조립을 북미에서 하도록 요구하면서 글로벌 완성차 업체는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 원료를 중국이나 러시아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 공급받기 위해 공급망 다변화에 나서는가 하면, 북미 생산 기지를 확대하는 데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배터리 소재의 원산지를 관리하게 된 완성차 업체들은 캐나다, 호주, 인도네시아, 브라질, 칠레 등 미국 우방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최근 호주 글렌코어PLC와 배터리에 사용할 코발트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테슬라는 브라질 광물업체 '발리'와 캐나다에서 니켈을 수년간 공급받기로 했다. 전기차와 배터리 생산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와 협력하고 있는 현대차그룹도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전략을 가다듬고 있다.
완성차 업체가 북미에 새로운 생산 공장을 짓거나 생산 능력을 확대하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폭스바겐은 지난달부터 미국 테네시주 공장에서 전기차 'ID.4′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원래 독일 츠비카우 공장에서 생산했는데, 미국에서도 동시 생산을 시작했다. 폭스바겐은 앞으로 5년간 북미에 71억달러(약 9조3000억원)를 투자해 연간 60만대를 생산하는 전기차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지난 5월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105억달러(약 14조원)의 미국 투자 계획을 밝힌 현대차(005380)그룹은 조지아주에 설립하기로 한 전기차 공장의 착공 시기를 앞당기기로 했다. 현대차는 연내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 공장 기공식을 열고, 2024년 완공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당초 내년 상반기에 착공해 2025년 완공하는 게 목표였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와 FTA를 체결한 핵심 광물 생산국 호주, 캐나다, 칠레, 인도네시아와 광물 공급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우리 기업과 정부는 미국 인플레이션 완화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 보완을 요구하는 동시에 우리 기업이 미국 기업과 기술, 자본, 제판 협력 등을 확대할 수 있도록 미국 기업의 전략과 산업 동향을 분석해 세부적인 협력 전략을 함께 마련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