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현대차(005380)의 ‘그랜저’ 르블랑 트림을 계약한 직장인 김모씨는 그랜저 연식변경 모델이 나온 이후 고민이 생겼다. 현대차는 2022년형 그랜저를 출시하면서 르블랑 트림에 스웨이드 내장재와 뒷좌석 수동커튼의 옵션을 기본 적용하면서 가격을 인상했는데, 김씨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옵션이 장착된 차를 90만원 더 비싸게 구매하게 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기존에 계약한대로 2021년형 모델을 구매할 수 없냐고 영업점에 문의했지만 “이미 2022년형 모델 생산을 시작해서 새로운 모델만 구매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완성차 업체는 연식변경 모델을 출시하면 기존 모델 생산을 중단한다. 이전 모델 재고 물량이 남았다면 대기 순번이 빠른 계약자는 원래 계약대로 이전 모델을 인수할지, 연식변경 모델을 구매할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대기 순번이 늦은 계약자는 연식변경 모델을 구매하거나 기존 계약을 해지해야 한다.

김씨는 “다른 모델을 계약하자니 또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 그랜저 연식변경 모델을 구매하기로 했다”면서도 “지금 같이 대기가 긴 상황에선 차 업체가 연식변경 모델을 출시하지 않거나, 출시하더라도 소비자들이 기존 계약했던 조건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선택지를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급 소재인 스웨이드 내장재를 적용하면서 이전 모델보다 가격이 인상된 2022년형 '그랜저' 르블랑 트림 내부 모습./현대차 제공

지난 2월 ‘아반떼’를 계약하고 인도를 기다리고 있는 최모씨도 2022년형 모델이 최근 나오면서 가격이 60만원 인상됐다는 공지를 받았다. 스티어링휠 진동경고·실내LED등·소음차단이중접유리 등 일부 옵션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최근 완성차 업체들이 연식변경을 이유로 차 판매 가격을 크게 인상하면서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연식변경은 완전변경(풀체인지)이나 부분변경(페이스리프트)과 달리 디자인이나 성능 변화가 없고 일부 편의·안전 사양을 추가한 모델이다. 완성차 입장에서는 새로운 사양을 추가해 미래 모델을 선보이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새 차를 탄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완성차 업체의 생산 차질이 이어지면서 연식변경의 의미가 퇴색됐다. 출고 대기가 길어지면서 계약 후 1년이 지나서야 차를 받거나 2022년형 모델을 2023년에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동안에는 연식변경 모델이 출시되더라도 이전 모델과 비교해 가격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원자재 가격 상승을 이유로 완성차 업체들인 연식변경 모델 가격을 큰 폭으로 인상하는 사례가 늘었다.

그랜저의 경우 올해 7세대 신형 모델이 출시될 예정이라 최근 출시된 연식변경 모델도 곧 구형이 되지만, 현대차는 연식변경 모델에 옵션을 추가하면서 가격을 큰 폭으로 인상했다. 현대차는 이전에는 원하는 소비자만 돈을 더 내고 구매했던 12인치 컬러 LCD 클러스터(계기판)와 터치식 공조 컨트롤러 등을 기본 사양으로 추가했고, 트림에 따라서도 상품성을 높인다며 다양한 옵션을 기본 장착했다. 이전에는 선택해서 구매할 수 있는 옵션을 기본으로 탑재해 차 가격을 올리는 식인데, 2022년형 가격은 3392만~4486만원이다.

그랜저는 최근 10여년간 2011년(5세대)과 2016년(6세대)에 각각 풀체인지 모델이 출시됐는데 2011년 5세대 모델이 출시될 당시 가격은 3120만~4450만원이었다. 이 가격대는 6세대 모델이 나올 때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고 2019년형(3086만~4270만원)까지 유지됐다. 그런데 2020년 부분 변경이 이뤄지면서 가격이 3294만~4349만원으로 뛰었는데, 2021~2022년 연식변경 과정에서도 계속 가격이 올랐다.

기아(000270)도 최근 ‘K8′의 연식변경 모델을 출시하면서 몇 가지 옵션을 기본 적용했다. K8 하이브리드의 경우 연식변경만으로 가격이 100만원 넘게 올랐다. 기아 측은 “하이브리드 모델의 경우 계약자 50% 정도가 최상위 트림인 시그니처를 선택했다”며 “고급 사양에 대한 수요가 높다고 판단해 기존 프리미엄 옵션 패키지를 노블레스와 시그니처 트림에 각각 기본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이 결과 모든 소비자가 패키지 옵션을 강제로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과거에는 차를 계약하고 수주 내 차량을 받았기 때문에 연식변경이 이뤄지더라도 원하는 모델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기 차종의 경우 대기 기간이 1년 안팎에 이르는 지금은 기존 계약을 취소하고 새로 계약을 하면 또 1년 가까이를 기다려야 해 소비자가 선뜻 계약을 취소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차를 판매하는 업체가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완성차 업체들이 소비자들을 상대로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기아의 2023년형 'K8' 내부 모습./기아 제공

공정거래위원회가 2008년 마련한 자동차(신차) 매매약관에 따르면 소비자가 신차를 계약하고 차를 인수하기 위해 대기하던 중 완성차 업체가 자동차 설계·사양을 변경해 이전 계약대로 인도하지 못하는 경우 값을 올리거나 계약을 취소해도 법적인 문제가 없다. 소비자는 변경된 사양의 차를 인수하거나 계약을 취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약관에 따르면 소비자는 회사로부터 통지를 받은 7일 이내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자동차 회사는 계약금과 함께 정해진 이율로 이자도 반환해야 한다. 약관은 가격 인상에 따른 손해배상금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노조 파업이나 특수한 사정으로 생산이나 인도가 지연되는 경우 예외로 한다. 최근 부품 공급난은 완성차 업체의 고의나 과실이 아닌 특수한 상황으로, 완성차 업체가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하는 사유는 아닌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크다.

공정위 측은 “가격 인상이 동반되는 연식변경 모델 출시의 경우 소비자가 계약을 취소할 수 있고, 일정 부분 비용도 돌려받을 수 있다”며 “약관상 소비자의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 장치는 있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례적인 생산 차질로 소비자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만큼 협상력이 있는 소비자 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대기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동차 연식변경의 의미가 없어진 상황에서 완성차 업체가 옵션을 패키지로 판매하지 않고 소비자 선택권을 늘리도록 하거나 다른 인센티브를 주도록 해야 한다”며 “개별 소비자가 아니라 소비자 단체가 나서서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