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구에서 사는 디젤(경유)차 운전자 박모(33)씨는 최근 전체 차량 정비를 받고 엔진오일을 모두 교체했다. 박 씨의 차량은 2019년식에 주행이력 14만㎞로, 당장 교체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지만 최근 고유가에 연비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박씨는 “차 정비에 50만원을 썼는데 최근 경유 가격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연비 효율을 높이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디젤차 소비자의 근심이 깊어지고 있다. 디젤은 가솔린(휘발유)보다 저렴하고 같은 양으로 더 많은 거리를 달려 연비 효율이 높다는 것이 강점이었는데, 최근 경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디젤차의 장점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또 글로벌 환경규제로 디젤차들은 단종수순을 밟는 한편, 성능이 좋은 전기차들이 양산되면서 디젤차의 입지가 더 좁아지게 됐다.

23일 서울 시내의 한 주유소에서 경유 가격이 휘발유 가격보다 비싸게 판매되고 있다./ 연합뉴스

25일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사이트 오피넷에 따르면 전국 평균 휘발윳값은 리터(L)당 2001.62원, 경윳값은 리터당 1918.64원이다. 올해 초 휘발유는 1600원, 경유는 1400원대로 두 유종 가격 차가 200원 정도 났으나, 지금은 경윳값이 더 많이 올라 차이가 100원도 나지 않는다. 일부 주유소에서는 경윳값이 휘발윳값보다 비싼 경우도 나온다.

최근 경유 가격 폭등세는 완성차 업체의 ‘탈(脫)디젤’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디젤차는 한 때 국내에서 가솔린차보다 많이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지만, 세계적인 배출가스 규제 강화와 친환경 차 지원이 확대되면서 완성차 업체들은 디젤 라인업을 줄이거나 단종하고, 하이브리드 등 친환경 차량을 늘리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기아(000270)가 인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쏘렌토’의 디젤 모델을 단종했고 제네시스는 ‘G70′과 ‘G80′의 디젤 모델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해 중국 정부가 요소 수출을 제한하면서 불거진 요소수 부족 사태도 디젤차 수요에 악영향을 줬다. 디젤차량은 요소수가 없으면 차량 운행이 불가능하다. 지난해 월별 신차 등록을 보면 1월을 제외하고 11개월 연속 디젤차 판매량이 전년 동월대비 큰 폭 줄었는데, 요소수 사태가 심각했던 10월에는 판매량이 63.1% 급감하기도 했다.

실제로 최근 수년 사이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디젤차의 점유율은 급감하는 추세다. 디젤차는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가 집계를 시작한 2013년, 전체 승용차 시장에서 점유율 32.4%를 차지했다. 이후 2014년 38.6%, 2015년에는 44.7%까지 치솟았으나 작년에는 15.4%로 떨어졌다.

국내 소비자의 디젤차 기피 현상은 중고차 가격에도 반영되고 있다. 최근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인해 신차 공급이 지연되면서 중고차 시세는 방어되거나 오히려 오르는 추세인데, 디젤차 가격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온라인 중고차 매매 플랫폼 엔카닷컴에 따르면 2019년식 기아 스포티지 더 볼드 디젤 2.0 2WD 노블레스 트림은 2020년 3월 기준 2471만원이었으나 현재는 2230만원으로 200만원 이상 떨어졌다. 반면 같은 연식의 가솔린 2WD 노블레스 트림은 현재 2190만원으로 2년 전(2197만원) 대비 차이가 없다.

현대차가 앞으로 출시할 두 번째 전용 전기차 '아이오닉6'의 컨셉카 '프로페시'./현대차 제공

2019년식 현대차 올 뉴 투싼 디젤 2.0 2WD 프리미엄 트림은 2년 전인 2020년 3월 2530만원 선에서 거래됐으나 이날 기준 2230만원으로 300만원 이상 떨어졌다. 같은 모델의 가솔린 2WD 프리미엄 트림은 2020년 3월 2430만원, 이날 2380만원으로 차이가 크지 않다. 중고차 업계 관계자는 “몇 년 전 대비 디젤 모델을 찾는 소비자들이 크게 줄었다”며 “중고차 매입 딜러들도 디젤차를 우선으로 찾았던 과거와 달리 하이브리드 등 친환경차를 선호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디젤차의 빈자리는 수년 새 급성장하고 있는 전기차가 차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기차는 주행거리가 짧고 성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최근에 출시된 전기차는 주행거리가 500㎞에 육박하고, 주행 성능도 디젤차에 뒤지지 않는다. 곧 출시될 BMW 전기 쿠페 i4 M50은 최고출력 544마력으로, 최대 주행거리는 480㎞대(미국 EPA 기준)다. 올해 하반기 출시될 현대차의 전기 세단 아이오닉 6는 쏘나타급 중형 세단 크기에 77.4kWh 용량의 배터리가 탑재돼 1회 충전시 500㎞ 이상 주행할 것으로 예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