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6일 도쿄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 결승. 오진혁(40) 선수가 쏜 마지막 화살이 10점 과녁에 꽂히며 금메달을 결정짓자, 대표팀 선수들은 서로 주먹을 부딪히며 환호했다. 특히 막내인 김제덕(17) 선수가 경기 중 “오진혁, 김우진(29) 파이팅”을 외치며 삼촌뻘 선배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은 대중들에게 화제가 됐다. 위계질서가 강한 스포츠 세계에서 이같은 모습은 보기 드문 일이다.

10대, 20대, 40대가 한 팀을 이뤄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블라인드 선발’의 이점이 드러난 결과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양궁협회를 후원하는 현대자동차그룹은 선수단 선발이나 협회 운영에 일체의 관여를 하지 않지만 협회 운영은 투명하게, 선수 선발은 공정하게 해달라는 원칙만은 고수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역시 능력있는 젊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승진 연차를 폐지해 직급을 단순화하고, 대졸 공채 대신 상시 채용을 하는 등 수평적인 문화와 더불어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이 조기에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26일 일본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남자 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이 안창립 감독과 금메달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연합뉴스

◇ 양궁의 세계적인 경쟁력 비결은 ‘공정’

양궁 협회의 ‘공정’을 중요시하는 문화는 현대차그룹의 경영 기조와도 맞닿아 있다. 장영술 한국양궁협회 부회장은 “양궁의 세계적인 경쟁력은 공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정몽구 명예회장이 37년 전 양궁을 후원하기 시작할 때부터 강조했던 가치”라고 말했다. 이러한 원칙이 한국 양궁의 토대가 됐고, 한국에서 대표선수로 선발되면 세계 무대에서 강자가 되는 시스템이 정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장 부회장은 “안산 선수가 이번 올림픽에서 3관왕을 했어도 오는 10월 열리는 선발전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양궁 국가대표팀은 공정한 경쟁을 통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인재만 선발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양궁협회에 따르면 국가대표 선발과 관련된 모든 정보는 영상과 데이터로 기록돼 있다. 예선부터 국가대표 선발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기록해두고 결과를 분석한다. 저장해둔 기록을 토대로 보완 사항도 체크한다. 이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국가대표 선발이 불공정하게 진행되기는 어렵다. 실력만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대표선수로 발탁돼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이같은 시스템 덕분이라는 것이다.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고 있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이 기록들을 열람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한 양궁대표단을 격려하고 있다./현대차 제공

장 부회장은 “지금의 선발 방식이 없었다면 이번에 금메달을 딴 김제덕 선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도쿄 올림픽은 2020년도에 열릴 예정이었다가 코로나19로 올해로 미뤄졌다. 이 때문에 2019년에 국가대표를 선발했다가 2020년에 다시 한번 선발전을 치르고, 2021년 봄에 추가로 선발했다. 김제덕 선수는 2020년에는 선발되지 못했으나 2021년 선발전에서 발탁됐다.

◇ 현대차의 연공서열 타파, 양궁과 닮은 꼴

현대차그룹도 연공서열과 순혈주의를 타파하고 젊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조직 문화를 바꿔가고 있다. 과감하게 인재를 영입하고, 나이가 아닌 능력에 따라 승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양궁 여자 개인전 금메달을 딴 기보배 선수가 장영술 당시 총감독과 정의선 대한양궁협회장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조선일보 DB

정의선 회장은 수석부회장 시절이었던 지난 2019년에 새 인사 제도를 도입했다. 사원·대리·과장·부장 등으로 이어지는 연공서열주의 직급을 수평적으로 단순화한 것이다. 일반직 직급은 6단계에서 4단계로 단순화했다. 5급사원과 4급사원은 G1, 대리는 G2, 과장은 G3, 차장과 부장은 G4로 통합했다. 호칭도 단순화해 G1~G2는 ‘매니저’, G3~G4는 ‘책임매니저’로 합쳤다. 임원 직급 역시 이사대우·이사·상무·전무·부사장·사장으로 이어지는 6단계에서 상무·전무·부사장·사장 등 4단계로 줄였다.

당시 현대차그룹은 “우수 인재를 수시로 발탁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를 정착하려는 것”이라며 “직급을 단순화한 것은 일 중심의 수평적이고 유연한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 30일 일본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안산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주먹인사를 나누고 있다. 혼성 단체전, 여자 단체전에서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안산은 개인전 결승에서도 승리해 사상 첫 올림픽 양궁 3관왕이 됐다. /연합뉴스

직원 평가방식은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꾸고 승진연차 제도도 폐지했다. 직원을 ‘평가’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직원을 ‘육성’하는 관점에서 성과관리, 상호협업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승진연차를 폐지한 것은 역량과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이 조기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G3로 승진한 직원은 바로 다음 해 G4 승진 대상자가 될 수 있다. 능력만 있다면 바로 상위직급으로 승진할 수 있고,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팀장이나 임원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울러 현대차그룹은 인재 선발 방식을 대규모 공개채용 대신 수시채용으로 전환했다. 수많은 지원자 중 일부를 골라 부서에 배치하는 방식은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수시채용으로 인재를 채용하면, 현업 부서가 필요한 때 준비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신체 조건, 학력, 출신지 등을 지원서에 적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도 지속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