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5일 도쿄 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 결승 경기가 열린 유메노시마공원 양궁장. 변덕스러운 바닷바람에도 한국 여궁사들이 쏜 화살은 흔들림이 없었다. 세계 랭킹 1위인 강채영 선수는 시속 200㎞가 넘는 화살을 쏴 과녁 정중앙을 정확히 뚫었다. 이날 한국 여자 양궁 대표팀은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를 상대로 6개 세트를 모두 승리해 금메달을 땄다. 우리나라 여자 양궁 단체팀은 1988년 이후 9개 대회 연속 최정상을 지키고 있다.
다음날인 26일 남성 양궁 대표팀 역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나흘 뒤인 30일에는 국가대표 안산 선수가 혼성전과 단체전에 이어 개인전까지 석권하면서 올림픽 양궁 역사상 첫 3관왕에 등극했다.
◇ 전국 1900여명 중 세계 최강자 나온다… 한국 양궁의 놀라운 생산성
한국이 올림픽 무대에서 강세를 보인 ‘효자’ 종목은 많다.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은 한국에 가장 많은 메달을 안겨주는 종목으로, 다수 결승전에서 우리 선수들이 금메달을 놓고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 역시 우리나라에 상당한 메달을 안겨준 종목이다.
하지만 쇼트트랙은 반복되는 파벌 논란과 팀내 분쟁, 성(性)범죄 사건이 잇따르면서 경기 성적이 들쑥날쑥할 뿐 아니라 메달을 딴 선수들이 러시아, 중국으로 귀화하는 사례가 잇따라 발생했다. 태권도 역시 성적이 저조해 이제는 종주국에서 금메달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 돼버렸다.
양궁은 예외다. 한 번의 불황 없이 꾸준히 정상을 지키고 있는 양궁은 다른 종목에서는 흔한 파벌 논란을 겪지 않으면서 꾸준히 새로운 선수들을 양성해 최정상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등 양궁 대중화가 이뤄진 국가와 달리 우리나라는 양궁이 엘리트 체육으로 분류돼 일반인 중 양궁을 즐기는 인구가 많지 않다. 전국 초·중·고·대학교, 실업팀·군 등에 소속돼 대한양궁협회에 등록된 선수는 총 1912명 정도다. 그럼에도 한국 양궁은 30년 넘게 세계 1위를 지키는 놀라운 생산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양궁이 세계 정상에 선 비결은 압도적인 역량에서 비롯된다. 도쿄올림픽에 나간 김우진 선수는 3세트 동안 쏜 9발을 모두 10점에 꽂았다. 세계적인 대회에서 ‘퍼펙트 경기’를 보여줄 만큼 선수들의 실력이 월등히 높다. 하지만 한국 양궁의 힘은 선수 개인의 실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한국 양궁은 실력을 갖춘 선수단을 육성하고 훈련하며 그중 최고의 선수를 선발해 세계적인 대회에 내보내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로이터는 “한국 양궁이 메이저리그와 프로풋볼과 같은 전문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했다.
◇ 정몽구 명예회장 “회사 경영하듯 대회 준비해야 한다”
대한양궁협회에는 700페이지가 넘는 매뉴얼이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협회장을 맡으면서 마련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다듬어 온 것으로, 여기에는 국가대표 선발 진행 과정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 진행 준비사항부터 선수 숙지사항과 지도자 확인사항, 복장 규정까지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도핑 예방과 테스트, 적발 이후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도 있다. 매뉴얼에 따르면 정확한 테스트를 위해 도핑 검사를 두 차례 나눠 진행하는데 검사 주체도 각각 다르다. 또 정해진 시기에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 동선 내 깜짝 검사를 실시하기도 한다. 선수들은 이런 매뉴얼을 모두 숙지하고 있다.
양궁 선수 출신으로,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 양궁 국가대표팀 총감독을 맡았던 장영술 대한양궁협회 부회장은 “정몽구 명예회장이 협회장을 맡은 이후부터 협회는 모든 상황을 항시 준비하기 위해 시스템 매뉴얼을 만들기 시작했다”며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매뉴얼을 철저하게 만들어온 경험을 양궁협회에 그대로 이식한 것”이라고 말했다.
양궁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지만, 한국 양궁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하게 된 계기는 1985년 대한양궁협회장에 정몽구 회장이 취임하면서부터다.
현대차그룹의 양궁 후원은 정몽구 명예회장이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사장 시절인 1984년 시작됐다. 당시 LA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양궁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본 정 명예회장은 “한국인이 세계 1등을 하는 종목인데 지원을 못 받아 경쟁에서 밀리는 일이 생겨선 안 된다”며 지원을 결심했다고 한다.
훈련·대회 준비 과정에서 발생 가능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시행착오를 줄이는 것도 한국 양궁이 신화를 쓴 배경이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2000년 호주에서 열린 시드니 올림픽 준비 당시 “회사를 경영하듯 대회를 준비해야 한다. 시장조사를 완벽하게 해야 한다”며 햇빛·바람 등 현지 환경과 유사한 세트를 직접 세워 훈련하도록 했다.
현대차그룹이 해외 시장에 진출하기 전 현지 소득 수준과 소비 패턴 등을 분석해 시장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한 경험을 양궁협회에 전수해 선수들이 세계적인 무대를 대비하도록 지원한 것이다.
◇ “미래 못 보면 기업 망해… 양궁협회도 모든 경우의 수 대비”
한국 양궁팀의 유난스러운 훈련 방법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양궁 대표팀은 경기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 관중이 가득 찬 야구장이나 포 훈련을 하는 군부대를 찾아 활을 쏜다. 지난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중국 관중이 한국 선수들이 활을 쏠 때 호루라기를 불거나 페트병을 두드리며 방해하는 바람에 여자 개인전 우승에 실패하자 나온 자구책이다.
지난 2016년 리우 올림픽을 준비할 때에는 아버지에 이어 대한양궁협회장을 지내고 있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현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브라질 법인장을 호출하기도 했다.
점검 결과, 불안정한 치안과 자유분방한 남미 스타일의 응원이 선수들의 경기력을 저하할 수 있다고 판단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선수촌에서 경기장까지 거리가 33㎞에 달해, 협회는 경기장에 400m 떨어진 차고지에 선수들을 위한 식당·휴게소·샤워장을 마련했다. 현대차그룹의 대대적인 지원에 대해 배구 여제 김연경 선수는 “많이 부럽다”라고 하기도 했다.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모의대회를 언론에 공개한 것도 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한국 양궁의 연패 기록이 이어지면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카메라와 인터뷰에 익숙해지도록 한 것이다. 협회는 올림픽이 이뤄질 경기장과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 연습하고 해당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유튜브 인공지능(AI)은 이 영상이 실제 올림픽 장면으로 인식해 저작권 검열을 한 해프닝도 있었다.
장 부회장은 “기업이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면 실패하듯이 양궁협회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양궁협회는 벌써 다음 올림픽을 준비 중이다.
◇ 기술과 인적 자원에 투자하는 경영 철학도 계승
대한양궁협회는 기술과 인력에 투자해야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현대차그룹의 경영 철학도 이어받았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한국 선수들이 세계적인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지만, 국내 인프라가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다. 인재 발굴, 첨단 장비 개발에 나섰고, 체육단체 중 최초로 스포츠 과학화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는 현대차 전략기술본부의 역할이 컸다. 현대차는 양궁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안면을 인식해 심박수를 측정하는 기술, 좋은 화살을 골라내는 기술, 맞춤형 명상 프로그램과 활 그립 장비, 화살 위치를 분석하는 전자 과녁 등 다양한 기술을 지원했다.
특히 과거에는 미국 회사가 독점적으로 생산하는 양궁 화살의 품질을 검증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현대차가 품질 높은 화살을 선별하는 기술(슈팅 머신)을 구매하면서 우리 선수들은 최고 품질의 화살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현대차가 로봇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한 슈팅 머신은 제자리에서 화살을 수십 번 쏴 불량화살을 걸러낸다.
정의선 회장은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양궁 선수들의 공을 치하하면서 “국가대표팀이 진천에서 계속 연습, 시합을 잘해준 덕분에 올림픽에서 잘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특히 불량 화살을 골라내는 기술(슈팅 머신)이 중요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