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이 앞으로 5년간 미국에 8조원 이상을 투자해 기존 생산설비를 강화하고 현지에서 전기차도 생산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내 생산설비는 지난 1996년 아산공장 이후 25년 간 한 번도 증설이 이뤄지지 못했지만, 미국에선 대규모 설비 투자에 나선 것이다. 현지 수요 확대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지만, 국내에선 노조 반대에 가로막혀 미래차 전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현대차가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국내 사업장이 노조에 발목 잡혀 있는 사이 현대차그룹의 미래 모빌리티 거점이 해외로 이동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기차·자율주행차를 중심으로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은 선제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수익성을 높이고 미래 사업에 대한 투자금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의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변화를 거부하는 노조의 반발이 가장 큰 장애물이다.

현대차(005380)는 올해 초 첫 전용 전기차 모델 ‘아이오닉 5’를 공개하고 본격적인 양산에 돌입했다. 하지만 양산 전부터 진통이 이어졌다. 아이오닉 5를 생산하는 라인에 근로자를 얼마나 배치할지 정하는 맨아워(man/hour)를 놓고 노사 간 협의가 지연된 것이다. 현대차의 단체협약에는 신차나 부분변경 모델을 양산하기에 앞서 노사가 맨아워 협의를 거치도록 명시돼 있다.

갈등은 내연기관차보다 부품 수가 40% 적은 전기차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노조가 인력을 적게 배치하는 것에 반발하면서 시작됐다. 생산 차종이 달라지면서 근로자의 일감도 줄었는데 노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노사는 결국 일부 근로자를 다른 생산 라인에 배치하도록 하면서 맨아워에 합의했고, 사전계약이 시작된 지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양산을 시작했다.

현대차 울산 공장 근로자들이 퇴근하는 모습./조선일보 DB

아이오닉 5의 맨아워 갈등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게 업계 평가다. 전기차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생산 인력을 줄이는 등 미래차 시대에 맞는 판을 짜야 하는데, 노조의 입김에 현대차의 구조개편은 계속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지난 2019년부터 신규 생산직 인력 채용을 전면 중단하고 정년퇴직을 통한 인력 자연 감소에 의존하고 있다. 신규 인력에 제조 노하우를 전수할 수 없을뿐더러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 인력을 수혈받지도 못하고 있다.

국내 온라인 판매도 노조의 벽에 부딪혀 있다. 영업직으로 구성된 현대차 판매노조는 온라인을 통해 차량을 판매하면 실적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온라인 판매를 반대하고 있다. 글로벌 전기차 1위 업체인 테슬라는 온라인으로만 제품을 판매하고 있고,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 글로벌 업체들이 온라인 채널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대차는 노조의 등쌀에 국내 온라인 판매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가 발표한 미국 투자 결정 중 일부는 노조와 협의가 필요하지만,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이상 미국 내 생산 규모는 전보다 더 확대될 전망이다. 전기차·수소차·도심항공모빌리티(UAM)·로보틱스·자율주행 등 미래 모빌리티를 위한 인프라 구축 노력도 미국 내에서 대규모로 진행될 예정이다.

회사 안팎에서는 고용 유지와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노조의 몽니가 결과적으로 국내 사업장을 후퇴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내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올해 초 현대차가 국내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쏘나타·아반떼 생산 물량을 일부 국내로 가져오고 미국에 투싼 물량을 넘겼는데, 결과적으로 부가가치 높은 SUV 차종 생산을 해외에 넘긴 꼴이 됐다”며 “미국에서 전기차 생산을 시작하는 것도 그만큼 일자리가 해외로 넘어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