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의 뿌리인 지방 상권이 흔들리고 있다. 고임금·고금리·고물가 '3중고'에 인구 감소와 고령화까지 겹치며 지역 소상공인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할 해법으로 지역에 뿌리내린 '로컬 기업'이 떠오르고 있다. 이들은 지역의 고유한 자원과 콘텐츠에 창의성과 혁신을 더해 새로운 시장과 고객을 만들고 있다. 조선비즈는 로컬 기업의 성장 사례를 통해 지방소멸 시대, 대한민국 지역경제의 새로운 성장 해법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대전의 유명 빵집 '성심당'은 빵 하나로 사람을 대전까지 불러모은다. 1956년 문을 연 성심당은 튀김소보로, 딸기시루 등 인기 제품을 꾸준히 선보이며 성장했다. 특히 '대전에만 매장을 운영한다'는 원칙을 지키며 소비자들이 대전을 찾을 이유를 만들었다. 성심당을 찾은 방문객이 인근 카페와 식당, 전통시장까지 둘러보면서 주변 상권으로 소비가 퍼지는 이른바 '성심당노믹스'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성심당처럼 지역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지역을 성장의 무대로 삼는 '로컬 기업'이 지역경제의 새로운 해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수도권으로 사람과 소비가 몰리는 상황에서 지역의 자원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해 외부 고객을 끌어들이고, 소비와 일자리까지 만들어내는 기업들이다. 지방소멸의 악순환을 끊을 새로운 성장모델로 주목받는 이유다.
◇지방소멸 해법 '로컬 기업'...지역경제 선순환 이끌어
로컬 기업은 단순히 지방에 사업장을 둔 소상공인이나 기업과 다르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 자연, 특산물, 공간 등 고유한 자원을 사업의 경쟁력으로 삼고, 창의적인 상품과 서비스, 콘텐츠를 더해 차별화된 가치를 만든다. 핵심은 '그 지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외부 고객을 끌어들이는 데 있다.
하지만 지역 소상공인에게 '성장'은 커녕 '버티는 것' 자체가 경영 목표가 된 지 오래다. 송치영 소상공인연합회 회장은 "올해 상반기 자영업 폐업 건수가 62만4000건으로 반기 기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며 "인건비와 원재료 가격 등 고정비 부담은 커지는 반면 매출은 늘지 않고 마진까지 줄면서 소상공인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소상공인은 내수경제의 기반이다. 전국 약 790만 개 소상공인 기업체가 국내 전체 기업의 95%를 차지한다. 지역 곳곳에서 일자리와 소비를 만들어내며 상권을 지탱한다.
그러나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매출 규모가 크고 유동인구가 많은 핵심 상권의 약 3분의 2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상권 점포당 월평균 매출도 수도권은 5871만원인 반면 비수도권은 2883만원에 그친다. 서울은 1억373만원으로 지방의 약 3.6배다.
한 지방 소상공인은 "최저임금과 원재료비가 계속 오르는 데다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워 외국인 근로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인건비 부담은 커지는데 매출은 좀처럼 늘지 않아 가게를 운영할수록 남는 게 줄어든다"고 말했다.
지역에서 스스로 고객을 만들어내고 상권의 유입을 늘리는 로컬 기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배경이다.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소상공인 전문가 모종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혁신 로컬 기업이 지역 앵커 역할을 하며 고객을 불러들이면 주변 상권에 볼거리와 먹거리, 즐길거리가 늘어나고, 다시 더 많은 소비자가 찾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며 "상권이 커지면 새로운 창업과 투자가 이어지고 지역 내 고용 창출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지역에 뿌리...연구개발과 창의성 더해
성심당은 전국으로 매장을 넓히는 대신 대전에 뿌리내리는 길을 택했다. 창업자에 이어 3대째 변치 않는 경영철학이다. '대전에서만 만날 수 있는 브랜드'라는 희소성을 앞세우면서도 튀김소보로와 부추빵에 이어 딸기시루 등 새로운 제품을 꾸준히 개발하며 경쟁력을 키웠다.
성심당은 지난해 매출 2629억원을 기록했고, 계약직 등을 포함해 현재 직원은 약 1900명에 이른다. 영업이익은 643억원으로 전국구 베이커리 프랜차이즈 '뚜레쥬르' 등을 운영하는 CJ푸드빌(500억원)보다 많다.
'모모스커피'는 부산에 뿌리내렸다. 부산의 바다와 공간이라는 지역적 특성에 스페셜티 커피를 결합해 부산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브랜드를 구축했다. 2007년 부산 토박이 이현기 창업자 등 4명이 부산 금정구 온천장의 4평짜리 테이크아웃 매장에서 시작한 모모스커피는 현재 183명의 직원을 둔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매출은 320억원을 기록했다.
'서피비치'는 평범한 해변이었던 강원도 양양을 서핑 메카로의 변신을 이끌었다. 젊은 층이 양양을 찾게 만들면서 해변을 새로운 소비 공간으로 바꿨고, 최근에는 러닝과 요가 등 새로운 트렌드까지 접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자원과 창업가의 창의성을 결합하는 것이 지방경제에 필요한 혁신이라고 강조한다. 지역의 문제를 '낡은 상권'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는 기회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정희 소상공인정책학회 회장(중앙대 경제학부 교수)은 "지역을 잘 아는 기존 소상공인의 경험과 젊은 창업가의 창의성을 결합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야 한다"며 "청년 창업가가 지역에 직접 진출하는 것뿐 아니라, 청년층의 새로운 감각과 아이디어를 기존 소상공인과 연결해 변화하는 소비 트렌드에 맞게 사업을 고도화하는 방안도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로컬에서 글로컬로'…지역 자원 세계시장에 판다
지역에서 시작한 로컬 기업이 세계시장으로 무대를 넓히는 사례도 있다. 충남 서산의 '기린컴퍼니'는 지역에서 소비되던 감태를 고급 식재료로 재해석한 제품을 개발해 영국 런던 고든 램지 레스토랑 등 국내외 고급 식당에 판매하고 있다. 현재 미국과 프랑스, 영국, 호주, 싱가포르 등 16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기업이 성장하면서 지역 생산자도 함께 커졌다. 기린컴퍼니가 서산 감태 원물 매입을 늘리면서 감태를 채취하는 지역 가구는 기존 10가구 미만에서 약 100가구로 증가했다. 로컬 기업 하나의 성장이 지역 생산자의 소득 기반 확대와 지역 산업 활성화로 이어진 것이다.
정부도 로컬 기업을 지역경제 활성화의 중요한 축으로 보고 육성에 나서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창업부터 사업 고도화, 해외진출까지 성장 단계에 맞춘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민간 투자사가 성장 가능성이 있는 소상공인에 먼저 투자하면 정부가 후속 자금을 지원하는 '립스(LIPS)'를 통해 로컬 기업의 투자 유치와 성장도 뒷받침하고 있다.
김정주 중소벤처기업부 소상공인정책관은 "로컬 기업을 지역의 '핵점포'로 성장시키고, 핵점포를 중심으로 다양한 로컬 기업이 모여드는 골목상권 생태계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지역 새로운 상권 성장을 위해 적극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