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사인 유니콘을 중심으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가 '기술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한때 플랫폼과 앱 기반 서비스가 성장을 견인했다면, 이제는 AI와 반도체, 로봇 등 딥테크 스타트업들이 연구개발(R&D)을 핵심 경쟁력으로 내세우며 성장의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딥테크 스타트업들은 전체 인력의 70~90%를 R&D 인력으로 채우고, 투자금 역시 마케팅보다 핵심 기술 개발과 우수 인재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AI 시대 기술력이 기업 경쟁력과 기업가치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떠오르면서, 단기 실적보다 미래 경쟁력을 위한 선행 투자에 무게를 두는 것이다.
◇유니콘 키우는 딥테크 전략…"매출보다 기술 투자"
대표적인 사례가 AI 반도체 설계 유니콘 리벨리온이다. 리벨리온은 약 350명의 임직원 가운데 75% 이상을 R&D 인력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석박사급 연구진이 절반을 넘는다.
리벨리온은 차세대 AI 반도체 양산을 앞두고 매출을 크게 웃도는 규모의 R&D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리벨리온은 지난해 3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성장 단계의 딥테크 스타트업은 일반 제조기업처럼 '매출 대비 R&D 투자 비율'로 경쟁력을 평가하기 어렵다. 기술력이 기업가치를 좌우하는 핵심 자산인 만큼, 단기 수익보다 핵심 기술 확보와 우수 연구 인재 확보를 위한 선행 투자가 우선되는 구조다.
핵심 인재 확보에도 적극적이다. 리벨리온은 지난해 구글코리아 R&D 대표 출신 김홍석 박사를 소프트웨어 아키텍트 총괄로 영입했다. 리벨리온 관계자는 "구글을 비롯해 엔비디아, 메타, 인텔 등 글로벌 빅테크 출신 연구진을 잇따라 영입하며 글로벌 수준의 기술 경쟁력 확보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AI 모델 개발 유니콘 업스테이지도 R&D 중심의 성장 전략을 이어가고 있다. 2020년 설립된 업스테이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독파모)'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설립 5년 남짓한 스타트업이 국가 AI 연구개발 사업을 맡았다는 점은 국내 딥테크 스타트업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업스테이지는 전체 직원 190여 명 가운데 70% 이상이 개발자로 구성돼 있다. 올해는 딥러닝 분야 세계적 석학인 스탠퍼드대 최예진 교수와 뉴욕대 조경현 교수를 독파모 프로젝트에 합류시키며 글로벌 공동 연구도 확대했다. 창업자인 김성훈 대표 역시 홍콩과학기술대 교수 출신으로, 창업 초기부터 R&D 중심 조직을 구축해 왔다.
휴머노이드 로봇 스타트업 홀리데이로보틱스도 R&D 조직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시리즈A 투자에서 약 1500억원을 유치하며 기업가치 1조원을 인정받은 홀리데이로보틱스는 전체 직원의 87.5%인 42명을 개발 인력으로 두고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서울대, 카이스트, 삼성전자 출신 연구진을 중심으로 조직을 꾸렸으며 향후 R&D 인력을 100명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딥테크 투자 급증…'AI 쏠림' 우려도
이 같은 R&D 중심의 성장 전략은 스타트업 특유의 민첩한 조직 문화와도 맞닿아 있다. 대기업은 R&D 과정에서 여러 단계의 의사결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지만, 스타트업은 창업자 또는 최고경영자(CEO)와 R&D 조직이 직접 소통하며 연구 방향을 빠르게 결정할 수 있다. AI와 로봇처럼 실패와 개선을 반복하며 기술을 고도화해야 하는 산업에서는 이러한 민첩성이 중요한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최병철 한국벤처창업학회 회장(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교수)은 "스타트업의 가장 큰 강점은 속도"라며 "아이디어를 빠르게 기술로 구현하고 시장의 피드백을 즉각 반영해 다시 고도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대기업과 차별화되는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이어 "AI 시대, 기술과 인재가 중요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R&D 중심의 성장 전략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했다.
딥테크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도 빠르게 늘고 있다. 스타트업 투자 정보 플랫폼 더브이씨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AI·로보틱스 분야 투자금은 2조685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588억원)보다 5.8배 증가했다. 단기 실적보다 핵심 기술과 연구 인력을 확보한 기업에 투자자들의 자금이 집중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도 딥테크 스타트업 육성을 위해 R&D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올해 혁신 창업기업을 지원하는 '팁스(TIPS)' R&D 사업을 스케일업, 글로벌 등 성장 단계별 맞춤형 체계로 개편했다. 지원 규모도 기존 5억~12억원에서 최대 20억~60억원으로 대폭 확대했고, 관련 예산도 지난해 6470억원에서 올해 1조355억원으로 늘렸다.
다만 딥테크 투자 열풍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신중론도 있다. AI와 반도체, 로봇 분야는 대규모 R&D 자금이 장기간 투입되는 데다 상용화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높은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사업화에 실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은 "딥테크는 성공할 경우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그만큼 실패 위험도 큰 분야"라며 "AI와 로봇 분야로 투자와 인재가 과도하게 쏠릴 경우 다른 혁신 산업의 성장 기반이 약화될 수 있는 만큼 균형 있는 생태계 조성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