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법이 바뀌면 지하주차장 단열재 시장은 결국 대기업 제품으로 넘어갑니다. 저희 같은 중소기업은 시장 자체를 잃는 거죠."

지난달 24일 찾은 경기도 화성의 한 단열재 제조 중소기업 A사. 공장 안에서는 아파트 지하주차장 천장에 들어가는 단열재가 쉴 새 없이 생산되고 있었지만 현장 분위기는 무거웠다.

40년 가까이 단열재를 생산해 온 이 회사 대표는 생산라인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부의 화재 안전 강화 정책에 맞춰 수년간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인증까지 받았다"며 "이제 와서 다른 재료를 쓰라고 하면 공장을 접으라는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 화성의 한 단열재 제조 중소기업 공장. 공장 한쪽(사진 왼쪽)에 건축물 지하주차장에 사용되는 단열재가 쌓여 있다. /박용선 기자

건축법 개정으로 그동안 중소기업이 주력해 온 건축물 지하주차장 단열재 시장이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화재 안전 강화라는 정책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개정안이 화재 성능이 아닌 단열재의 재료를 기준으로 사용을 제한하는 '재료 중심 규제'를 담으면서 수백 개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지적이다.

◇지하주차장 단열재 시장 '中企→대기업' 재편 우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지난 4월 건축물 지하주차장에 사용하는 단열재를 불연재료로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은 건축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의결했다. 최근 공동주택과 물류시설 등에서 대형 화재가 잇따르자 화재 확산을 막고 건축물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염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민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제도 개선이라고 강조한다. 의원실 관계자는 "건축물을 모두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화재 위험이 큰 지하주차장부터 안전 기준을 강화하자는 취지"라며 "법안에는 2년의 유예기간도 담았다"고 설명했다.

반면 단열재 제조 중소기업계는 법 시행 이후 시장이 사실상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현재 지하주차장 단열재 시장에는 연관 분야를 포함해 약 900개 중소기업이 참여하고 있고, 유기질 단열재가 시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반면 불연 무기질 단열재 시장은 KCC(002380)벽산(007210) 등 일부 대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챗GPT

중소기업계는 특히 정부 정책을 믿고 진행한 R&D 결과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2010년대 중후반부터 건축자재 품질인정제도와 준불연 성능 기준, 실물화재시험 등을 단계적으로 강화해 왔다. 이에 맞춰 중소기업들은 수억 원을 투자해 준불연 유기질 단열재를 개발했고 정부 인증도 획득했다.

업계는 최근 문제가 된 지하주차장 화재 역시 제도 강화 이전에 시공된 기존 단열재에서 발생한 사례인 만큼, 현재의 고성능 제품까지 동일한 기준으로 규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광주의 한 단열재 제조 중소기업 대표는 "정부가 강화한 기준에 맞춰 개발한 제품과 과거 화재에 취약했던 제품을 같은 선에서 보고 재료만 바꾸라고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성능으로 검증된 제품까지 일률적으로 배제하면 그동안의 기술 개발 노력은 물론 국내 중소기업의 경쟁력까지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개정안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배관 보온재 제조 중소기업계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김윤옥 한국발포폴리에틸렌보온재공업협동조합 전무는 "앞으로 보온재까지 규제가 확대되면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산이나 대기업 제품이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재료 아닌 실제 화재 성능 중심으로 제도 설계해야"

전문가들은 화재 안전 강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규제 방식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재료 중심 규제'에 치우쳐 있다고 우려한다. 유기질은 위험하고 무기질은 안전하다는 이분법보다 실제 화재에서의 성능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건축안전 기준도 특정 재료를 일률적으로 제한하기보다 건축물의 실제 화재 성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 국내와 유사한 재료 중심 규제를 운영했지만 현재는 건축기준법에 따라 화재 확산 시간과 열방출량, 피난 가능 시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성능 중심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 미국 역시 국제건축기준(IBC)에 따라 개별 재료가 아닌 벽체 등 조립체 단위의 실물 화재시험을 통해 건축물의 화재 안전성을 평가한다.

왕남웅 한국건설방재시험연구원 부원장은 "특정 재료 하나만이 아니라 건축물 전체의 화재 안전 시스템과 실제 성능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관련 기업들이 지속적인 기술 개발과 성능 향상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