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핵심은 결국 '전기'입니다. 고전력 서버가 멈추지 않으려면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댐(캐패시터)'이 커져야 하죠. 헥사프로는 전통 뿌리기술인 알루미늄 표면 처리 아노다이징 기술을 기반으로 반도체 안에 수조 개의 나노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이 댐의 용량을 획기적으로 키웠습니다."
헥사프로는 알루미늄 표면 처리 방식인 '아노다이징(Anodizing)'을 활용해 나노 다기공 구조의 산화 알루미늄(AAO) 멤브레인을 만드는 기업이다. 서울대 화학공학 석사를 거쳐 2003년부터 20년간 베테랑 변리사로 활동한 김태선 대표가 2022년 창업했다.
삼성SDI 법무팀과 특허청 심판관(민간 개방형 4급 기술서기관)을 거치며 수많은 원천 기술을 목격해 온 그가 '직접 사업화'를 결심하게 만든 소재가 바로 AAO였다. 이 소재는 최근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AI 반도체와 전기차용 고용량 캐패시터(전기를 저장했다가 내보내는 부품)의 성능을 결정짓는 핵심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AAO는 1980년대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처음 제안된 유망 소재다. 나노미터(nm) 단위의 미세 기공이 벌집 모양으로 균일하게 배열된 구조 덕분에 반도체, 바이오 필터 등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기존 방식은 알루미늄 기판을 녹여서 제거하는 '멜트 어웨이(Melt away)' 공정을 써야 해 제조 비용이 비싸고 대면적 제작이 어려워 연구용에 머물러 있었다.
김 대표는 이 한계를 '세퍼레이션(Separation)' 기술로 돌파했다. 알루미늄 기판에서 AAO 층만 떼어내는 방식을 개발해 기판을 반복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김 대표는 "기존 대비 공급가를 3분의 1 이하로 낮추면서도 세계 최초로 관통홀 구조의 8인치 대면적 구현에 성공했다"며 "알루미늄 1개당 1장만 만들던 AAO를 이제는 50~100장까지 찍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헥사프로의 기술이 가장 빛나는 곳은 3D 실리콘 캐패시터 시장이다. 캐패시터는 전력을 보관했다가 내보내는 부품으로, 전극 면적이 넓을수록 용량이 커진다. 헥사프로의 AAO 멤브레인을 활용하면 기존 평면 구조보다 표면적을 1000배 이상 넓힐 수 있어 초고용량 칩 제작이 가능해진다.
김 대표는 "기존 MLCC(적층세라믹커패시터) 10~20개를 꽂아야 했던 회로 기판에 우리 소재를 쓴 3D 커패시터 하나면 충분하다"며 "전 세계 MLCC 1위인 일본 무라타가 7년 개발 끝에 상용화한 시장에 우리가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소재로 도전장을 내민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헥사프로는 국내 반도체 대기업 등과 실증 실험(PoC)을 진행 중이다. 헥사프로는 현재 20억 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 유치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팁스(TIPS) 졸업과 LF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시드 투자를 완료했으며, 누적 연구개발비는 22억 원에 달한다. 특히 과기정통부의 90억 원 규모 나노 소재 기술 개발 과제에 선정되며 기술적 신뢰도도 확보했다.
이번 투자금의 용처는 명확하다. '반도체 전용 양산라인 구축'이다. 김 대표는 "지금은 일반 산업용 설비로 대응하고 있지만, 반도체 공정에 맞는 항온항습 챔버와 자동화 라인을 갖춘 전용 설비가 필요하다"며 "2026년 상반기까지 8인치 이상 대면적 제조가 가능한 신규 라인을 추가해 연 매출 100억 원 이상의 생산 능력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헥사프로는 삼성전기에서 MLCC를 개발했던 전문가와 서울대 반도체 연구소 출신 박사 등을 영입해 소재부터 패키징 공정까지 아우르는 기술 내재화를 마쳤다.
김 대표는 인터뷰 내내 '모험 자본'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최근 VC(밴처캐피털)들이 바로 수익을 내는 스타트업에만 투자하는 경향이 있어 힘들지만, 에코프로 같은 소재 회사도 초기엔 힘든 시기를 겪으며 버텨냈다"며 "헥사프로는 기술선진국 독일에서 시작됐지만 '가능성'에 머물던 AAO 소재를 K 소부장의 힘으로 산업의 '표준'으로 만드는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