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1세대' 기업가 이기형 그래디언트(035080) 회장이 바이오 전략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신약 개발 대신 오가노이드 기반 위탁연구(CRO), 체외진단 등 바이오 서비스로 무게추를 옮기고 있다.
수년째 적자가 이어지면서 고위험 장기 연구개발(R&D) 투자를 뒤로 하고 비교적 빠른 매출 창출이 가능한 사업 중심으로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야놀자 매각 대금 165억 투입' 신약 자회사 청산…"손실 반영 완료"
20일 업계에 따르면 그래디언트는 현재 연내 완료를 목표로 테라펙스 청산을 위한 행정 절차를 밟고 있다.
테라펙스는 2020년 설립 이후 비소세포폐암 치료제를 중심으로 신약 개발을 이어왔지만 가시적인 임상 성과는 확보하지 못했다. 지난해 8월 전임상 단계 후보물질 'TRX-211'의 기술이전에 성공했지만 같은 해 11월 핵심 파이프라인 'TRX-221'의 개발 중단 사실을 알렸다. 회사는 중단 배경으로 전략적 비효율성을 들었다.
이후 조직은 빠르게 축소됐다. LG생명과학 출신 신약 개발 전문가인 이구 대표 역시 최근 회사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측은 "테라펙스는 지난해 임상 중단 이후 연구 인력 정리가 대부분 완료됐다"며 "일부 인력은 GBCC로 이동했다"고 설명했다.
남아 있는 후보물질과 관련해서는 "회계상 가치 산정 이후 GBCC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추가 개발보다는 기술이전 가능성을 중심으로 관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테라펙스의 지난해 매출은 10억원으로 그래디언트 연결 기준 전체 매출 3조615억원의 0.03% 수준이다. 당기순손실은 92억5400만원을 기록했다.
회사 관계자는 "야놀자에 전자상거래 사업부를 매각해 확보한 약 2000억~3000억원 가운데 165억원이 테라펙스에 투입됐다"고 말했다.
그래디언트의 출발점은 1996년 국내 최초 인터넷 쇼핑몰로 출범한 인터파크다. 이 회장은 데이콤 사내벤처로 회사를 시작해 1999년 코스닥에 상장했고, 2006년에는 사업부 물적분할을 통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이후 삼성그룹 MRO(소모성 자재) 계열사 아이마켓코리아(122900)와 연세의료원 계열 의약품 유통업체 안연케어를 인수하며 B2B 유통 사업을 중심으로 외형을 확대했다. 바이오 사업에 뛰어든 건 2020년 인터파크바이오컨버전스(IBC)를 설립하면서다.
2021년 여행·공연·쇼핑·도서 등 전자상거래 사업부 지분 70%를 야놀자에 매각한 뒤 인터파크는 IBC를 축으로 신약개발 자회사 테라펙스와 오가노이드 기업 그래디언트바이오컨버전스(GBCC)를 육성했다. 사명은 2022년 바꿨다.
◇258조 CRO 시장 선점 목표…"단기 손익보다 기술 역량 집중"
GBCC는 CRO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확보한 약 1000종 규모 환자 유래 오가노이드(PDO) 라이브러리를 바이오마커 발굴과 비임상 단계 약효 평가에 쓴다는 계획이다.
회사 관계자는 "유전체 분석 데이터를 활용한 AI 기반 신약개발도 검토했지만 비용과 기간 부담이 커 현재는 CRO 사업 중심으로 전략을 조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전략은 지난해 남인봉 그래디언트 대표가 GBCC 대표직을 겸직하면서 구체화되고 있다. 그래디언트는 지난해 10월 GBCC에 대한 40억원 규모의 자금 대여도 결정했다.
회사 관계자는 "GBCC는 CRO 사업 고도화 과정에 있다"며 "오가노이드 시장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 구체적인 사업 계획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증자 대신 대여 방식으로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업 계획 수립이 마무리 단계에 있는 만큼 향후 유상증자를 통해 자금을 회수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포춘비즈니스인사이트에 따르면 북미 CRO 서비스 시장은 2032년까지 1754억6000만달러(약 258조원)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GBCC의 지난해 매출은 2억7000만원 수준이며 당기순손실 규모는 89억9100만원이다.
그래디언트가 지난해 체외진단기기 기업 엔비포스텍을 종속기업으로 편입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엔비포스텍은 원자힘현미경(AFM)을 활용한 액체생검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오가노이드 기반 CRO 사업과 함께 비교적 상업화 가능성이 높은 사업으로 분류된다.
회사 관계자는 "현재 미국 클리아랩(CLIA Lab)을 통해 검사 서비스 상업화 가능성을 검증하고 있다"며 "빠르면 올해 말 또는 내년 초 연구 데이터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결과에 따라 FDA 승인 신청 일정을 검토할 계획이다.
업계는 그래디언트가 재정비를 통해 흑자 전환에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그래디언트는 지난해 연결 기준 295억원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테라펙스 청산 영향으로 적자 폭이 더 늘었다.
현재 그래디언트의 주요 수익 창출원은 아이마켓코리아다.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가운데 아이마켓코리아 매출이 1조9221억원으로 61.71%를 차지했다. 다만 지난해 해당 부문영업손익은 79억4500만원 적자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