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해 온 '제조업 패러다임'이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우리 제조업은 중국의 매서운 추격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복합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산업의 모세혈관이자 공급망의 뿌리인 중소 제조 현장은 인력난과 원가 상승, 생산성 정체라는 '3중고'에 신음하며 한계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제 생존을 위한 유일한 돌파구는 'AX(AI 대전환)'뿐이다. 인공지능(AI)은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낡은 공장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한국 경제의 성장 엔진을 다시 돌릴 최후의 보루다. 조선비즈는 절벽 끝에 선 중소 제조기업들이 왜 AX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지, 그리고 대한민국 제조업이 나아가야 할 '신(新)성장 지도'를 집중 조망한다. [편집자주]

부산 강서구 송정동 동아플레이팅 도금공장. 자동차 시트용 볼트가 자동화 레일을 따라 절삭유 제거와 아연 도금, 수세, 건조 등 공정을 거쳐 생산되고 있다. /동아플레이팅 제공

지난달 29일 부산 강서구 송정동 동아플레이팅 도금공장. 공장 안에서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볼트 수백만 개가 담긴 바구니가 레일을 따라 쉼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볼트가 담긴 바구니 하나의 무게는 약 50㎏. 입고 검사부터 절삭유 제거, 전해 탈지, 아연 도금, 수세, 피막 처리, 건조, 최종 검사 등 완제품이 나오기까지 거치는 공정은 약 20단계에 달한다.

10년 전만 해도 근로자들이 공정마다 이 무거운 바구니를 직접 옮기고, 볼트를 도금 등 장비에 투입하며 작업했다. 공정마다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한 라인에만 10명 가까운 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재는 자동화 시스템이 바구니를 옮기고 공정을 연결한다. 한두 명의 관리자가 전체 라인을 통제한다. 과거 수작업 중심일 때 이 공장의 하루 생산량은 7~10톤 수준이었지만, 현재는 하루 약 45톤을 처리한다.

이오선 동아플레이팅 대표는 "도금과 표면처리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후방 공정이지만, 자동차와 기계의 수명과 안전을 좌우하는 제조업의 기초 체력"이라며 "이 뿌리 산업이 디지털 전환을 해야 한국 제조업이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도금공장도 시스템으로...뿌리 산업의 디지털 전환

동아플레이팅은 자동차 안전벨트, 시트 등에 사용되는 볼트와 너트 등을 아연도금으로 표면처리하는 중소기업이다. 현대자동차와 기아, 폴크스바겐, 볼보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2024년 매출은 약 60억원이다.

도금업은 금속 부품의 부식을 막고 내구성을 높이는 필수 공정이지만, 오랫동안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3D 업종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었다. 인력 의존도가 높고 작업 환경이 열악해 젊은 인력이 기피하는 산업으로 여겨졌다. 동아플레이팅은 이러한 한계를 기술과 시스템으로 돌파하며 도금업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이오선 동아플레이팅 대표는 지난달 29일 조선비즈 인터뷰에서 "도금은 제조업의 기초 체력"이라며 "이 뿌리 산업의 디지털 전환이 한국 제조업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박용선 기자

이 대표의 출발점은 제조업과 거리가 멀었다. 보험회사 영업조직 소장이었던 그는 1997년 파산 위기에 놓인 영세 도금업체인 동아플레이팅을 수습하러 들어갔다가 회사를 인수하게 됐다.

"도금이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다"는 그는 현장 직원들의 불신 속에서 생존부터 고민해야 했다. 그는 매일 새벽 가장 먼저 출근해 직원들과 함께 일하며 도금 공정을 하나씩 배웠다.

회사의 성장 방향을 바꾼 결정적 계기는 자동화였다. 이 대표는 "도금업이 영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술자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하는 구조 때문"이라며 "사람이 바뀌면 품질이 흔들리는 구조를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동아플레이팅은 2010년 도금 자동화 라인을 처음 도입했고, 2016년에는 사무·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2018년부터는 중소벤처기업부와 삼성전자가 추진하는 '대·중소 상생형 스마트공장' 사업에 참여하며 전사적 디지털 전환에 나섰다. 생산성은 37% 향상됐고, 불량률은 77% 감소했다. 제조 리드타임도 25% 줄었다. 현재 스마트공장 고도화 3.0 단계로, 공정 자동화율은 약 90%에 이른다.

동아플레이팅 부산 도금공장은 2022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직접 방문해 스마트공장 운영 현황을 점검한 곳으로 알려지며 주목받았다. 이 공장은 3D 업종으로 인식돼 온 도금업 분야에서 스마트공장 도입 대표 사례로 언급된다.

◇스마트공장 이후 AX…에너지·환경까지 확장

동아플레이팅의 다음 목표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와 AI(인공지능)다. 이 대표는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친환경 도금 공정을 개발·검토하고 있다"며 "AI 기반 무인 라인을 통해 에너지 효율과 환경성을 동시에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지역과 인재에 대한 책임도 강조했다. 그는 "부산의 젊은 인재들이 수도권으로 떠나지 않고 지역 산업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뿌리 산업에 디지털과 AI 기술이 적용되면 젊은 인재가 오고, 기업과 지역이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동아플레이팅은 전체 직원 28명의 평균 연령이 36세로, 20~30대 비중이 72%에 달한다.

이 대표는 현재 부산 청정표면처리조합 이사장과 부산상공회의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중소 제조기업의 현장 변화가 쌓여야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유지된다"며 "3D 업종으로 불리던 공장이 다시 선택받는 산업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