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해 온 '제조업 패러다임'이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우리 제조업은 중국의 매서운 추격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복합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산업의 모세혈관이자 공급망의 뿌리인 중소 제조 현장은 인력난과 원가 상승, 생산성 정체라는 '3중고'에 신음하며 한계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제 생존을 위한 유일한 돌파구는 'AX(AI 대전환)'뿐이다. 인공지능(AI)은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낡은 공장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한국 경제의 성장 엔진을 다시 돌릴 최후의 보루다. 조선비즈는 절벽 끝에 선 중소 제조기업들이 왜 AX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지, 그리고 대한민국 제조업이 나아가야 할 '신(新)성장 지도'를 집중 조망한다. [편집자주]

지난 28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향미 AI 테크 기업 '주미당'이 운영하는 플래그십 스토어 '룻(Root)'에서는 낯선 장면이 펼쳐졌다.

술을 빚는 이야기의 출발점이 쌀이나 누룩이 아니라, 컴퓨터 화면 속 자연어 프롬프트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숙련자의 감각과 경험에 의존해 오던 전통적인 양조 현장과는 분명히 다른 풍경이었다.

"유자의 신맛은 날카롭지 않게, 껍질의 오일 향이 먼저 올라오고 이후 은은한 단맛으로 감싸는 구조로 해줘. 도수는 8도 내외, 탄산은 청량하게."

김동완 주미당 대표가 말을 마치자, 향미 레시피 설계 파운데이션 AI '알케미(Alchemy)'가 작동했다. 약 3분 뒤 화면에는 새로운 주류 레시피가 완성됐다. 기존 양조장에서라면 최소 3개월, 길게는 1년까지 걸리던 향미 설계 과정이 단 몇 분으로 압축되는 순간이었다.

김 대표는 "술 맛을 잡기 위해 관능(감각) 평가를 반복하다 보면, 하루만 지나도 사람의 미각과 후각이 둔감해져 효율이 급격히 떨어진다"며 "알케미는 프롬프트로 입력한 조건을 바로 레시피로 구현해 시행착오와 비효율을 획기적으로 줄였다"고 말했다.

룻은 주미당이 큐레이션한 기존 다양한 증류주와 자체 개발한 주류를 음식에 맞춰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주미당의 '양조업 AX(AI 전환)' 전략을 실험·검증하는 전초기지다.

김동완 주미당 대표가 지난 28일 서울 안국동 플래그십 스토어 '룻'에서 향미 레시피 설계 파운데이션 AI '알케미'를 설명하고 있다. /주미당 제공

알케미는 대규모 향미 분자 데이터와 관능 반응 데이터를 학습한 AI다. 향료 성분 간의 화학적 상호작용을 예측하고, 이를 기반으로 원하는 맛과 향을 구현하는 최적의 배합 레시피를 생성한다. 단순히 기존 데이터베이스에서 유사한 조합을 추천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용자가 원하는 향과 맛의 구조를 입력하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조합을 직접 설계한다.

◇'사람의 감각'에 맡기던 양조업, AI로 혁신

주미당은 기존 숙련자의 감각과 경험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양조산업에 AI 기술을 입혀 공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김 대표는 "양조 시스템을 AI 기반으로 전환하는 AX를 추진하고 있다"며 "제조 현장의 품질과 속도를 동시에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효과는 수치로 확인된다. 주류 제조 과정에서 최초로 설계한 맛과 향이 실제 완제품으로 동일하게 구현되는 비율은 평균 35% 수준에 그친다. 그러나 알케미를 적용한 경우, 동일 품질 재현율을 93%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주미당은 현재 전국 12개 양조장에 알케미를 공급하며 레시피 개발과 실증을 함께 진행 중이다.

주미당은 단순한 AI 설루션 기업에 머물지 않는다. 현재 12개 프랜차이즈, 약 400개 매장에 맞춤형 주류를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공급하고 있다. 양조장에는 AI 레시피 설계 서비스를 제공하고, 음식점에는 완제품을 납품하는 이원화된 사업 구조다.

전북 고창에 자체 양조장을 둔 주미당은 각 매장의 메뉴에 맞춰 단맛 중심의 주류, 꽃 향이 강조된 주류 등 다양한 스타일을 설계한다. 얼그레이 하이볼, 자몽향 위스키부터 탁주와 증류주까지 제품군도 폭넓다.

성장 속도 역시 가파르다. 주미당은 설립 첫해인 2023년 매출 1억9000만원을 기록한 데 이어 2024년 21억원, 지난해 17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 목표 매출은 450억원이다.

◇향수, 뷰티 산업에도 AI 적용…로봇의 미각·후각 구현 목표

주미당은 김 대표가 2023년 창업했다. 김 대표는 학창시절부터 창업을 꿈꿨다. 연세대 정보통계학과를 졸업한 그는 SK에서 근무한 후 창업에 나섰다.

김 대표는 "시각과 청각은 이미 디지털 기술로 고도화됐지만, 향과 맛은 여전히 생산자와 설계자의 주관적 감각에 의존한다"며 "이 구조를 기술로 혁신하고 싶었다"고 창업 배경을 설명했다.

주미당은 향수와 뷰티 시장 확장에도 나섰다. 이미 향수 생산공정에 적용 가능한 AI 설루션을 개발했고, 뷰티 분야에서도 브랜드가 추구하는 향을 기준으로 제품 라인업 전체를 설계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악취 저감 등 산업용 영역 진출도 검토 중이다. 현재 글로벌 기업 두 곳과 협업을 논의 중이다.

김 대표는 "스킨, 로션, 색조 화장품 등 여러 제품 조합만으로도 수만 개의 향 설계가 가능하다"며 "소비자가 기분과 옷차림, 목적지에 맞춰 집에서 향을 만들 수 있는 시대를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향과 맛을 설계하는 범용 파운데이션 AI'를 구축하겠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의 최종 목표는 더 멀리 있다. 그는 "언젠가 휴머노이드 로봇이 냄새를 맡고 맛을 보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로봇이 요리하면서 국물을 맛보고 즉석에서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감각 기술의 기반이 주미당의 파운데이션 AI가 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