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해 온 '제조업 패러다임'이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우리 제조업은 중국의 매서운 추격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복합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산업의 모세혈관이자 공급망의 뿌리인 중소 제조 현장은 인력난과 원가 상승, 생산성 정체라는 '3중고'에 신음하며 한계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제 생존을 위한 유일한 돌파구는 'AX(AI 대전환)'뿐이다. 인공지능(AI)은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낡은 공장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한국 경제의 성장 엔진을 다시 돌릴 최후의 보루다. 조선비즈는 절벽 끝에 선 중소 제조기업들이 왜 AX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지, 그리고 대한민국 제조업이 나아가야 할 '신(新)성장 지도'를 집중 조망한다. [편집자주]
"찰칵. 드르륵, 드르륵."
지난 14일 경기도 용인 신성이엔지 스마트팩토리. 사람의 팔을 닮은 협동 로봇 두 대가 가로·세로 1.2m 크기의 육중한 장비 앞에 멈춰 섰다. 로봇에 달린 '눈(비전 센서)'이 순식간에 나사 구멍을 포착하더니, 3초 만에 볼트를 정확히 조여냈다. 반도체 공장의 필수 설비인 '팬 필터 유닛(FFU·산업용 공기 청정기)'을 만드는 공정이다.
과거 숙련공 두 명이 달라붙어 종일 매달려야 했던 40번의 볼트 조임 작업을 이제는 로봇이 막힘없이 해낸다. 1977년 창립해 반도체 클린룸 국산화를 이끈 '48년 제조 맏형' 신성이엔지가 인공지능(AI)과 로봇을 입고 '젊은 공장'으로 다시 태어난 현장이다.
클린룸은 초미세먼지와 온도, 습도를 정밀하게 제어하는 고청정 생산 공간이다. 신성이엔지는 2024년 매출 5823억원을 기록했고, 이 가운데 클린룸 사업이 전체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같은 해 영업이익은 50억원이다.
◇불량률 '500'에서 '50'으로… AI가 바꾼 제조 공식
신성이엔지 용인공장은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후방 기지'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기업의 클린룸에 들어가는 핵심 장비가 이곳에서 연간 10만 대씩 쏟아져 나온다.
이 공장의 변신은 한국 제조업이 처한 '3중고(인력난·고비용·저효율)'를 AX(AI 전환)로 어떻게 돌파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범 답안이다. 2016년 디지털 전환(DX)에 착수한 이후 생산성은 극적으로 개선됐다.
성과는 수치로 증명된다. 사람의 감이나 수작업에 의존하던 공정을 데이터 기반으로 뜯어고친 결과, 시간당 생산량은 도입 전보다 29% 치솟았다. 더 놀라운 것은 품질이다. 100만 개당 502.7개(502.7ppm)에 달하던 공정 불량 건수는 52개(52ppm)로 10분의 1 토막이 났다. 불량률 감소폭만 89.7%다. 납기 또한 19% 빨라졌다.
조현성 신성이엔지 제조본부장은 "클린룸 장비는 고객사의 급박한 증설 스케줄에 맞춰 '제때, 완벽하게' 공급하는 것이 생명"이라며 "재고를 쌓아두고 파는 게 불가능한 수주 산업의 한계를 데이터 기반의 실시간 생산 시스템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현재 FFU 생산 라인의 자동화율은 80%에 달한다.
◇ 전기도, 안전도 AI가 통제… '다크 팩토리' 꿈꾼다
이 공장의 AI는 단순히 나사만 조이지 않는다. 공장 전체의 에너지 흐름을 읽고 통제하는 '두뇌' 역할까지 맡는다.
공장 지붕과 유휴 부지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이 전기를 만들면, AI가 15분 단위로 공장 내 전력 사용량을 분석한다. 생산 일정에 따라 전기가 많이 필요한 순간과 덜 필요한 순간을 계산해, 자체 생산한 태양광 전력을 쓸지 외부 상용 전력을 끌어다 쓸지 스스로 판단한다. 이 '지능형 에너지 관리' 덕분에 공장 가동에 드는 에너지 비용을 19%나 줄였다.
안전 관리 역시 AI로 고도화했다. 디지털 트윈(가상 모형) 기술이 적용된 관제 시스템은 작업자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추적한다. AI가 CCTV를 통해 작업자의 관절 움직임까지 분석, 평소와 다른 이상 행동이 감지되거나 위험 구역에 접근하면 즉시 경고음을 울린다.
신성이엔지의 최종 목표는 불 꺼진 공장, 즉 '다크 팩토리(Dark Factory)'다. 사람이 개입하지 않아도 공장이 스스로 상태를 진단하고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단계다.
조 본부장은 "AI는 단순한 자동화 도구가 아니라 생산, 에너지, 안전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제조의 신경망"이라며 "노후화된 제조 현장에 AI 심장을 이식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우리 제조업이 살길"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