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관련 스타트업 A사는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유망 스타트업을 위한 연구·개발(R&D) 과제를 받아 내년까지 이를 마치는 대가로 총 5억원을 받기로 하고 관련 인력을 뽑았다.

한데 A사는 별안간 올 하반기 중 시작하는 2년 차 과제 지원금을 80%만 지급하고, 20%는 내년에 주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예산은 첫해 3억원이, 둘째 해 나머지 2억원이 각각 지급되는 방식이었는데, 올해 받아야 할 예산(2억원) 가운데 4000만원은 추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A사를 포함, 관련 예산을 지원받는 스타트업 상당수가 이를 인건비에 투입하고 있는 점이다. 예고 없이 인건비를 지급하지 못하게 될 경우 현재 인재를 유지하기 힘들 뿐 아니라 추후 비슷한 인력을 다시 뽑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최악의 경우 인력 부족으로 연구 과제 자체를 제대로 끝내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정부로부터 지원금 환수 페널티를 물 수 있게 된다.

A사 대표는 “과제 선정 전부터 외부 차입이 있었기 때문에 금융기관으로부터 추가 대출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가족, 친구 등에게 돈을 빌리려고 뛰어다니고 있다”며 “내년까지 알아서 버티라고만 할 게 아니라 지원금 지연 지급에 대한 대안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토로했다.

서울 강남구 구(舊) 역삼세무서 사거리에 있는 창업지원센터 ‘팁스타운’ 전경. /조선DB

24일 업계를 종합하면, 최근 중기부의 창업 성장·기술 혁신 사업 R&D 예산 지연 지급이 스타트업계를 발칵 뒤집어놓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해 내년(2025년) 종료되는 과제 599개가 대상이다.

당초 중기부는 정부의 R&D 예산 삭감 기조에 맞추어 창업 성장·기술 혁신 사업 R&D 예산을 80%만 지급하려 했다. 그러나 해당 사업 대상이 중기부가 중점 지원하는 스타트업 투자·육성 프로그램 팁스(TIPS·Tech Incubator Program for Startup) 선정 기업이라는 점에서 반발이 거세지자 올 1월 감액 없이 이를 100% 정상 지급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문제는 이미 올해 관련 예산이 20% 삭감됐고, 그 규모가 약 400억원에 달하기 때문에 이를 내년에 마련해 지급하기로 하면서 벌어진 것이다.

올 초 중기부의 100% 정상 지급 약속에도 일부(20%) 예산이 지급 지연되는 것은 초유의 일이어서 이에 대비하지 못한 스타트업 사이에선 성토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이에 중기부도 별도 보도자료를 내고 “팁스 R&D 지원은 감액 없이 정상 지원될 것”이라며 “올해 종료 과제 486개는 올해 사업비 전액을 100% 지급 완료했고, 내년 종료 과제 599개에 대해서도 2025년 예산에 반영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문제는 A사의 사례처럼 해당 스타트업이 당장 유동성 위기에 몰릴 수 있다는 점이다. 22일 한국엔젤투자협회는 팁스 운영사를 대상으로 관련 스타트업의 피해 사례를 파악하는 메일을 배포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갑작스런 예산 지급 지연으로 팁스 선정 스타트업은 추가 투자 유치를 모색하거나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에서 나오는 보증 대출,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의 청년 전용 창업자금 등을 알아보려는 수요가 늘고 있다”면서 “개인 신용대출은 물론 사채까지 알아보는 등 올해 미지급 4000만원에 대해 자구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기업 스스로 자구책이 없을 경우 팁스 운영사가 긴급 투자에 나서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중기부의 예산 지급이 예정돼 있는 만큼 정부가 특별 보증으로 기업들이 올해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일각에선 ‘스타트업의 과한 요구’라는 목소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복수의 업계 관계자는 “4000만원가량을 당장 못 받는다고 해서 폐업까지 운운하는 것은 과한 것 같다”면서 “비상 경영 체제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게 창업자의 경영 능력이고, 사업을 끌고 나가기 위해 단기적으로 신용 대출을 받든 개인 돈을 투입하든 융통해 내년 초 이를 받아 변제하면 되는 것이지, 정부가 안 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너무 과한 책임을 물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팁스를 제외한 다른 R&D 예산은 50%가 깎였는데, 100% 주는 것만으로도 특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