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나이를 먹고, 언젠가 모두 노인이 된다.

사진: KBS 제공

나이가 들수록 세상의 한복판에서 한 걸음씩 밀려나는 순간도 생긴다. 익숙했던 일터를 떠나고, 거리도 가게도 온통 젊은 사람들 차지인 것 같은 세상. 노년의 하루는 길어지는데, 정작 그 긴 하루를 보낼 곳은 마땅치 않다. 그래서 어떤 동네는 특별해진다. 혼자 가도 심심하지 않고, 큰돈이 없어도 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처음 만난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곳. '어르신들의 홍대'라 불리는 서울 제기동이 그렇다.

제기동역에서 청량리역으로 이어지는 약 700m 거리, 이 길 위로 놀 줄 아는 어르신들이 모여든다. 대낮부터 어디선가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 '한낮의 디스코 - 서울 제기동 72시간'에서 만나본다.

◆ 노인을 위한 동네는 있다.

어르신들에게 지하철은 세상과 이어지는 든든한 발이다. 요금 부담 없이 몸을 실으면 서울 어디든 갈 수 있다. 그 발길이 유독 많이 모이는 곳이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이다. 제기동역에서 승차하는 이용객 중 47.2%, 절반 가까이가 만 65세 이상의 경로우대 승객이다. 개찰구에서부터 백발의 어르신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이토록 많은 어르신이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기동역에서 청량리역까지 이어지는 약 700m의 거리엔 아홉 개 시장이 맞닿은 전통시장과 저렴한 밥집이 사람의 활기로 북적인다. 오래된 다방과 당구장도 단골들을 맞는다. 하루 이용료 단돈 6천 원에 시간제한도 없는 당구장에선, 낯선 이와도 금세 가까워진다. 이들이 제기동을 찾는 이유는 그저 값이 싸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자식이 우리가 가고 싶은 데를 이렇게 날마다 데리고 다녀요. 그죠? 다들 그래요. 전철이 자식보다 낫다고" - 김윤자_72세

◆ 한낮의 디스코

젊은이들이 불타는 금요일에 홍대로 향한다면, 어르신들에게도 불금을 보내는 곳이 있다. 제기동과 청량리 일대의 '콜라텍'이다. 노년의 불금은 해가 중천에 뜬 한낮에 시작된다. 한껏 멋을 낸 어르신들이 하나둘 콜라텍으로 들어서면, 화려한 조명이 돌고 음악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넓은 댄스홀이 펼쳐진다. 맞잡은 손끝으로 온기가 오가고, 서로의 발끝에 박자를 맞추는 그 순간. 그 순간만큼은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저문 줄 알았던 청춘이 황혼에 다시 피는 순간을 마주한다.

"저는 여기 일대를 '실버 홍대'라 그래요. 하루에 2만 원 들여서 즐겁게 시간 보내고 그럴 수 있는 곳이 또 있나요?" -이상윤_67세 (콜라텍 인터뷰 中)

◆ 인생의 주인공은 여전히 '나야 나'

제기동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거리가 아직 어둑한 새벽 5시에도 시장은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중에는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자신의 일터를 지키는 어르신들이 적지 않다.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누군가는 하루의 활력을 위해 여전히 일터로 향한다. 이유는 달라도 내가 할 일이 있고, 나를 기다리는 자리가 있다는 것은 이들의 하루를 계속 움직이게 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삶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자신의 자리에서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하루를 채워가는 제기동의 어르신들. 인생의 주인공은 여전히 자신이다.

◆ 누구나 맞이할 노년의 얼굴

제기동 거리를 걷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된다. 이곳의 어르신들은 누군가 언젠가 닿을 내일의 얼굴이라는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그 모습 속에, 누구나 맞이할 노년의 밑그림이 담겨 있다. 나이 든다는 것이 그저 저물어 가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저녁놀이 하루의 끝에서 가장 짙은 빛을 내듯, 오래 살아낸 시간은 사람을 더 깊고 또렷하게 만든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도 조금씩 분명해진다.

"10대, 20대는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왔고, 30, 40대는 세상이 내 세상인 줄 알았고, 50대, 60대에는 좀 익어가는 마음이 들더라고, 80을 바라보니까 인생도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가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게 주관이 돼서 열심히 살아요. 하루하루" - 진충수_74세

내레이션은 배우 염혜란이 맡았다. 친근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로 제기동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지나온 세월만큼 깊어진 리듬으로 오늘도 자신의 무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한낮의 디스코 - 서울 제기동 72시간'은 오늘(14일) 저녁 8시 30분 KBS 2TV에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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