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해온 정지영 감독이 신작 '내 이름은'에 배우 염혜란의 열연으로 제주 4.3 사건, 아직도 이름을 찾지 못한 희생자들의 살풀이를 춘다.

영화 '내 이름은'(감독 정지영, 제작 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공동제작 M83·비바필름, 배급 CJ CGV·와이드릴리즈)은 촌스러운 이름을 지우고 싶은 18살 아들 영옥(신우빈)과 손자뻘 아들을 키우는 엄마 정순(염혜란)의 2대에 걸친 이야기를 통해 제주 4.3 사건의 아픔과 위로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에서 '제주 해녀' 광례로 호평받았던 염혜란이 또 다른 '제주 어멍'이 돼 시대의 아픔을 열연으로 풀어낸다. 

특히 영화는 역사적 비극을 이야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던 정지영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 '남부군', '남영동 1985' 등 다수의 작품에서 한국의 현대사적 사건들을 조명해온 정지영 감독은 '내 이름은'에서 제주 4.3 사건을 부담스럽지 않게 풀어내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다. 

이야기는 제주 4.3 사건이 해금됐던 1998년, 정순과 영옥의 시점에서 두 가지 액자식 구성으로 전개된다. 봄만 되면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만 봐도 기절할 정도로 외출조차 힘든 정순이 자신의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늙은 엄마 슬하에서도 구김살 없이 지내던 영옥이 서울에서 온 전학생 경태(박지빈)를 만나며 겪는 변화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정순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 회복하기 위해 기억의 파편 속 공간들을 찾아가며 추억인지 잔상인지 모를 시간의 축을 거슬러 간다. 선글라스 없이는 제대로 된 운전조차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고, 기절을 반복하지만 그럼에도 정순의 의지는 멈출 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영옥은 등장부터 강렬했던 경태의 존재감에 점점 잠식될 것만 같다. 늘 바꾸고 싶던 촌스러운 이름도 경태 한마디에 쉽게 바뀌어 호명된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의 병도 자세히 알 정도로 죽마고우였던 친구 민수(최준우)와는 멀어진다.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지만 어딘지 불량하고, 친구들 사이 폭력도 서슴지 않는 경태와 모범생 반장 출신 민수는 결코 공존하기 힘든 녀석들이다. 그 사이 영옥은 민수의 친구였다가 경태의 무리였다가 격정적인 사춘기 감정에 휩쓸리며 갈팡질팡한다. 

일련의 과정은 고통과 폭력을 동반한다. 정순은 기억을 되찾을 수록 자식의 죽음, 남편의 죽음, 가족의 죽음, 친구의 죽음 계속되는 죽음과 직면한다. 눈물과 고통이 뒤엉킨 기억은 결코 추억으로 미화할 수 없는 국가적 폭력의 잔상이다. 그가 4월 3일이 있는 봄만 되면 유독 괴로워했던 이유가 정순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있었다. 

영옥은 마침내 기억을 회복한 엄마의 옆에서 바꾸고만 싶던 자신의 이름을 잃지 않는다. 무엇보다 끝까지 민수와 함께하며 경태가 야기한 학교 폭력에 저항한다. 국가적 폭력에 묻어둔 기억을 되찾으며 상처를 회복해가는 정순과, 전학생이 불러온 외부의 폭력에도 우정을 되찾는 영옥의 이야기는 이렇듯 닮아있다. 

동시에 제주 4.3 사건을 회복하기 위한 우리의 한 방법을 보여준다. 봄만 되면 쓰러지는 늙은 엄마임에도 다정한 정순과 영옥의 관계, 티격태격 하다 못해 주먹다짐까지 했지만 결국엔 우정을 회복하는 영옥과 민수처럼 함께 부딪히는 것. 정지영 감독이 제시한 방법은 상처를 묻어두지 않고 함께 직면하는 '연대'다. 

물론 역사적 사건을 다루기에 빠질 수 없는 일종의 '거-룩'함이나,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묵직한 분위기는 '내 이름은'이 상업 장편 영화로서 갖는 걸림돌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한 투자금 모금에 이미 시민 관객 9778명의 모금이 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이들 약 1만 명은 제주 4.3 사건의 영화화에 기꺼이 동의하며 시간과 금전을 내놨다. 

정지영 감독은 이들의 이름을 '내 이름은' 엔딩 크레딧에 담아내며 헌사를 바쳤다. 뿐만 아니라 염혜란을 위시한 연기자들과 정지영 감독을 필두로 영화 스태프들까지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고. 때때로 한 영화는 만드는 과정 자체가 역사가 되기도 한다. 극장과 영화계가 불황일지 언정 이런 영화의 도전도 계속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최근 대통령이 제주도에서 국가적 폭력에 의한 민형사상 시효를 폐지했다. 올해로 78주기를 맞은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 추념식에 법으로 응답한 셈이다. 이를 두고 각종 해석과 이해득실을 따지기 전에, 묫자리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난 희생자들을 위한 '내 이름은'의 살풀이를 권하고 싶다. 어떤 정치적, 영화적 수사보다도 그저 기록과 화해를 위한 가치가 있다.

러닝타임 113분, 4월 3일 열이틀 뒤 개봉.<

[사진] 렛츠필름, 아우라픽처스 제공. 

[OSEN=연휘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