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넘쳐나는 은유를 풀어내다가 관객이 먼저 지친다. 심미적 아름다움은 간직했지만, 몽롱한 메타포에 취해 서사의 힘을 잃은 거장의 은퇴작이었던 것.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지난 25일 개봉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약칭 그대들은...)'는 일본 애니메이션계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이다. 지난 2013년 공개된 '바람이 분다'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가 10년 만에 선보인 작품이다. 지브리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하울의 움직이는 성',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다수의 명작 애니메이션으로 호평받은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신작이자 앞서 은퇴작으로 알려졌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먼저 개봉한 일본과 북미에서부터 시선을 끌며 한국에 뒤늦게 상륙했다.

영화는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11살 소년 마히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보금자리에 적응하느라 힘들다. 그런 소년 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왜가리 한 마리가 나타난다. 저택에서 일하는 할멈들은 마히토에게 왜가리가 사는 신비한 탑에 대해 들려준다. 이후 마히토는 왜가리의 안내를 받아 '이세계'에서 모험을 벌인다.

작화는 '역시'를 연발하게 만들 만큼 아름답고, 2D 애니메이션은 물론 지브리 스튜디오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과 다양한 색채 활용은 탄성을 자아낸다. 입체감을 강조한 3D가 만연해진 최근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지브리 스튜디오 만의 감성을 원했던 관객들에게는 만족을 선사할 만 하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장면들이라도 유기적으로 연결됐다는 인상을 주기엔 부족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언뜻 보기엔 소년 마히토와 신비한 왜가리의 이세계 모험기라는 단순해 보이는 플롯을 보여주지만, 이세계에서의 모험 과정이 상당히 복잡하고 그 과정에 파편적으로 느슨하게 연결돼 있다.

영화는 어떤 장르를 차치하고라도 기본적으로 한 편의 '이야기'다. 줄거리를 이해하기 힘든 장면의 나열과 구성, 특히 이세계에서 넘쳐나는 메타포와 은유들이 몰입과 이해를 방해한다. 일본과의 과거사에 대한 한국 관객들 만이 가질 수 있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오는 불편함도 있지만 이에 대한 고려는 뒤로 넣어둬도 될 정도로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른다. 앞선 일본과 북미 개봉 당시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 가장 불친절한 작품'이라는 평이 속출했던 바. 왜 그런 평이 나왔는지를 수긍하게 만들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소년과 왜가리'라는 원제와 달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이가'라는 한국의 제목이 꽤 그럴싸한 해석이라는 점이다. 이세계의 왜가리, 할아버지와 현실 세계의 소년 마히토의 윤회와 같은 관계를 통해 열도 애니메이션의 거장은 다분히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에 영화를 통해 자식, 손자 같은 관객들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훈계에 가까운 질문을 던진다. 애초에 메시지 자체가 의문문 격인 작품인 만큼 관객들 각자가 가진 답에 따라 작품의 메시지는 달라지고 동시에 일치한 답을 찾기 어렵다. 다수의 관객이 동시에 즐겨야 하는 영화라는 대중매체의 특성상, 이와 같은 불특정 다수의 열린 결말이 적합한가에 대해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지브리 스튜디오에 대한 향수, 은퇴를 번복하긴 했지만 또 언제 돌아올지 모를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다면 봄직하다. 그러나 수준 높은 작화를 넘어서, 윤회 사상에 대한 감독의 이해와 그만의 철학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관객 개개인보다 거장의 답이 듣고 싶었다 해도 마찬가지. 어떤 작품도 관객의 해석은 나오는 만큼 감독의 답이 듣고 싶었다면 욕심인 걸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답은 감추고 관객의 이해만 요구하는 선문답. 아름답지만 불친절한 이 수작이 불편한 이유다. / monamie@osen.co.kr

[사진] 메가박스 중앙 제공.

[OSEN=연휘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