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히 길을 걷다 벼락을 맞은 꼴이다. 그러면 그 불행에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는 게 마땅하지 않나?

“오래 전 불행이 마치 유령처럼 다시 무천을 휘감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MBC 금토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 Black out'에서 현건오(이가섭 분)의 빈소를 찾은 예영실(배종옥 분)이 현구탁(권해효 분)에게 한 말이다.

틀렸다. 무천을 휘감고 있는 건 ‘오래 전 불행’이 아니라 ‘오래 묵은 이기심’이다.

그 자리에서 예영실은 11년 전 사건 진상의 일단을 드러냈다. 당시 예영실은 형사과장 현구탁을 불러 말했다. “피의자가 이미 특정됐다고 들었습니다. 법원 판결까지 세 달 드리죠. 능력을 보여주세요.” 이유를 묻는 현구탁에게는 “승진이 경찰대 5기 중 제일 늦은 것이 능력 때문인지, 공정치 못한 시스템 때문인지, 그게 궁금해서요.”라 답했다.

그럴 리가. 예영실은 박다은(한소은 분) 살해 진범이 자기 남편 박형식(공정환 분)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 맞다. 그런데 뜻밖에 경찰은 고정우(변요한 분)를 피의자로 특정했다. 예영실로선 그런 채로 조속히 사건이 매조지어지길 바랐었다.

그리고 11년 후 또다른 피해자 심보영의 백골사체가 발견되면서 당시 사건이 다시 부상했다. 남편을 ‘그때 그 살인자’로 특정한 누군가의 협박 메시지도 목격했다. 도지사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판이다. 유실된 진실의 봉분을 다시 한 번 보수할 필요가 생겼다.

현구탁을 만났다. 그의 아들 빈소에서. 말 꺼내기 적절한 자리는 아니지만 예영실은 주저없이 제안했다. “그때 서장님은 약속을 지키셨어요. 저도 약속을 지켰구요. 서장님, 이제 저랑 수원으로 가셔야죠.” 닳고 닳은 정치인 예영실은 현구탁의 야망 그득한 내심을 통찰했다. 경기도경찰청쯤이면 현구탁이 움직일 거라고 확신했다. 11년 전 그때처럼.

작가가, 그리고 연출이 의도한 풍자씬이 그 다음 이어진다. 상주인 현구탁에게 위로하는 척 달라붙는 양흥수(차순배 분)와 신추호(이두일 분). 제 자식들 때문에 무고한 자식을 잃었는데 자식 잃은 애비에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알랑방귀 뀌며 제 자식들을 부탁하는 모습이란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차라리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이 양반들아!” 낮게 호통을 치고서야 쭈뼛쭈뼛 물러나는 철면피들.

현구탁은 그 둘을 물리고 아들의 영정 앞에 마주선다. 유서를 통한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병무랑 민수도 저처럼 끝까지 벌받게 해주세요. 아버지! 이제 자수하셔야 돼요.” 얼굴을 씻은 현구탁이 아들 영정에 할 수 있는 대답은 “미안하다”였다. ‘내 자식 위해서’란 그나마의 명분을 갖춘 ‘겨 묻은’ 양흥수 말처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인간의 이기심이 갖는 이율배반의 속성을 한 눈에 보여준 영리한 테이크였다.

비슷한 상황이 심보영의 부모 심동민(조재윤 분)-이재희(박미현 분)에게서도 나타난다. 노상철(고준 분)이 심보영의 핸드폰에 남아있는 이재희의 문자를 거론하며 “문자내용을 보면 미안한 일을 하셨던데 그날 따님 만났죠? 언제 어디서 봤어요?” 추궁할 때 이재희는 화인처럼 찍힌 그 순간이 떠올랐다. 현구탁과 함께인 자신을 향해 “더러워”라며 돌아서던 딸의 모습. 하지만 이재희는 “그날 보영이.. 못봤어.”라고 자리를 박찬다.

그 이재희는 신추호, 양흥수에게 돈을 받으러 나서는 심동민을 만류한다. “돈 준다는 거, 합의금이란 거, 이상하지 않아? 받지마.” 심동민은 들뜬 채 말한다. “많이 준대. 좀 더 받아낼 수도 있고.”

이재희가 발작한다. 제 안의 죄책감까지 잔뜩 보태 퍼붓는다. “너 진짜 인간 아니다. 보영이한테 해준 것도 없으면서. 우리 딸 그렇게 죽은 거 불쌍하긴 하냐? 속으로 웃는 거 아냐? 지난 10년 동안 죽은 보영이 이용해 먹었잖아. 지난 10년 동안 보영이 피 빨아 먹으면서 살았잖아!” 이 경우 차라리 속보이는 심동민이 겨 묻은 쪽이 아닐까?

한편 ‘산 사람’ 현구탁은 예영실이 결정해 준 자신의 쓸모에 맞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 쓸모는 이번에도 사건 조기종결이다. 타깃은 신민수(이우제 분). 경찰밥 좀 먹고 나름 강단 있는 양병무(이태구 분)보단 어려서부터 겁 많은 신민수 쪽이 낫다.

신민수를 끌어내 아들 잃은 아비의 분노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리곤 잔뜩 주눅 든 신민수를 상대로 예의 ‘내가 원하는 바 저놈 입으로 말하게 하기’ 스킬을 가동한다. “민수야! 잘 들어.너하고 너의 부모 쪽박 차고 평생 떠돌아 다니고 싶지 않으면 사실을 말해야 돼. 사실을! 병무가 다 시킨 거라고. 그게 사실이잖아. 그지?”

그렇게 신민수가 자수하고 고정우 앞에서 다시 양병무가 체포된다. 노상철이 “아버님, 신민수가 이미 자백했다고요. 심보영 강간 폭행 및 살인, 양병무가 지시했다고.”라 양흥수에게 설명해줬음에도 양흥수는 덜 떨어진 순박한 이기심을 고정우에게 쏟아낸다. “너잖아. 너라고 해! 너라고 해! 너잖아!” 마치 “제발 너라고 해주세요”로 들리는 양흥수의 어깃장은 차라리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러니 현재까지 날벼락 맞은 고정우에게 예의를 갖춘 존재는 현수오-건오 형제 뿐이다. 신추호는 현구탁에게 말했었다. “우리끼리 니 애, 내 애가 어딨어? 다 같이 키웠잖어!” 근데 왜 이들은 유독 고정우에게만 제 손으로 날벼락을 내리고 그 무고함을 알면서도 사시뜨고 대하는 걸까?

끌려가던 양병무가 뜻밖의 말을 한다. “최나겸 좀 불러줘. 최나겸. 덕미 좀 불러달라고!” 고정우가 “덕미가 왜?”라고 물었을 때 양병무는 말한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이거 다 걔가 짠 판야.”

그리고 13일 방영된 9회는 11년 전 심보영이 죽은 그 현장 창고에서 히스테리에 빠진 아이들을 단숨에 주목시키며 등장한 주근깨 소녀 최나겸(고보결 분)에게서 엔딩을 맞았다.

최나겸. 고교시절부터 고정우에 락온(Lock-on)된 소녀. 하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심보영처럼 스스럼없는 친구행세도 못하고, 언감생심 박다은처럼 여친노릇은 꿈도 못꾼 고정우바라기다.

그 최나겸은 “너 니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했고 나 누가 뭐래도 너 믿어.”라고 했다. 하지만 최나겸은 당시 현장에 있었고 범인으로 몰린 고정우를 위한 어떤 증언도 하지 않았다. 고정우를 독점하고 싶은 이기심은 고정우의 망가진 인생에 어떤 예의도 갖추지 못했다.

16회로 예정된 이 드라마의 전반부는 심보영 사건이 감당했다. 그리고 후반부는 박다은 사건이 메인 스토리를 장식할 모양이다. 그리고 최나겸은 심보영 사건의 남은 미스테리를 풀 키 캐릭터인 동시에 박다은 사건에는 좀 더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캐릭터일듯한 느낌을 준다. 가령 박형식이 받은 문자의 전송자라거나, 예영실이 훔쳐본 문자의 전송자라거나.

어쨌거나 그 간의 주변부 인물 최나겸, 예영실, 박형식과 병원에 갇힌 현수오 등이 바통을 이어받아 활약할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후반부도 많이 기대되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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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방송 캡처, 방송사 제공

[OSEN=김재동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