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놈의 배에 칼을 먹이고 바야흐로 그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나온다. “팔자에도 없이 이 무슨..” 말도 못맺고 달려드는 다른 놈을 베어 넘긴다. “빌어먹을 놈들이 왜 와 가지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칼을 빗겨 내며 다시 한 칼. “꽃소리는 얼어죽을..” 잠시 한 호흡 쉬는 틈에 “지금쯤 아랫목에 등이나 따뜻하게 지져야 되는 건데..” 불만 한 소절 매듭짓는 눈길에 아등바등 힘겨루기에 돌입한 놈이 보인다.

“그래, 저거 죽게 내버려두자!” 터져나오는 말과 다르게 움직이는 이 육신은 대체 누구의 몸뚱인가?

MBC 금토드라마 ‘연인’의 이장현(남궁민 분)이 이율배반의 늪에 시나브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이장현 사전에 ‘위기탈출 넘버 원’ 임금에 대한 충성따윈 애시당초 없었다.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니 따뜻한 남쪽나라로 피난 가 등 따시게 소일하다 오랑캐가 물러난 뒤 올라오면 만사형통이었다.

문제는 얼어죽을 꽃소리였다. 아니 제 가슴에 분꽃 피는 소리를 들려준 유길채(안은진 분)란 여인네가 문제였다. 눈에 쏙 들어오자마자 심장 한 켠에 콕 박혀버린 여인네의 안위가 은근 걱정돼 능군리를 다시 찾았을 때 송추할배(정한용 분)와 이랑할멈(남기애 분)의 주검을 목격했다.

자신의 손으로 회혼례를 올려준 나름 소중했던 이들의 죽음. 딱 그 죽음의 책임만 물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청군의 약탈조를 사냥하다 위기에 빠진 길채를 구해준 것 까지도 좋았다. 그 길채 입에서 “서방님 피하세요!”란 말을 들었을 땐 ‘비혼주의는 개뿔’ 길채에게 정착할 생각도 들었었다.

그래서 놀려먹을 겸 자신의 결심을 알리기로 하고 입을 뗐다. “그래서 말이지, 비록 내가 비혼의 삶을 살고자 했으나 낭자가 그리도 나를 서방 삼고 싶다면 말이지..” 하는데 엉뚱한 대꾸가 고막을 때린다. “연준 도련님처럼 보였나부지. 그러니 서방님 소리가 나왔겠지. 내가 설마 비혼나부랭이랑..”

장현은 밤마실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연준 도령으로 보였다?” 돌아서며 장현은 섣부르게 정착할 꿈을 꾸었던 스스로가 민망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이었다.

다시 길을 떠나며 길채 놀리기를 계속했다. “생각해 보면 말이요. 내 목숨도 낭자가 구했지. 날 연준도령으로 착각하고 우렁차게 피하라고 소리친 덕분에 내 오랑캐를 피했으니까” “자꾸 놀릴 거예요?”라고 발끈하는 길채에겐 “낭자가 철이 들면 내 낭자 놀리는 걸 그만두지.” 농처럼 얘기한 진담. 길채가 철이 들면, 그래서 장현이 놀리길 그만둘 때 즈음이면 가시버시가 되리라는 다짐처럼도 들린다.

장현의 발길을 멈춰세운 건 이번엔 패잔병 신세가 된 ‘그 놈’ 남연준(이학주 분)이었다. 밤을 지새며 장현은 연준과 처음으로 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는다.

“오는 길에 은애낭자를 만났소. 이제라도 임금님 구하는 거 그만두고 은애낭자를 지키러 가는 게 어떻소?” 연준이 답한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나는 배운 거 따로 사는 거 따로 할 줄 모릅니다. 평생 나라에 화급한 일이 생기면 나가 싸우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 배웠소. 여인이 사내를 따르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고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는 질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섬김을 받았으니 사내와 부모는 여인과 자식을 보호하고 임금과 사대부는 백성을 지킬 의무가 있어요. 난 임금을 구하다 죽을 겁니다. 내가 임금을 위해 죽으면 임금께서 백성들을 지켜줄 것이오. 내가 믿는 것은 그 뿐입니다.”

여전히 이장현의 가치관과는 상반되는 유교 탈레반, 젊은 성리학 꼰대의 말이지만 장현은 살짝 감화된 모양이다. 옳든 그르든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고 행동한다는 것은 장현이 보기에도 가치 있어 보였으니. 그래서 팔자에도 없어야 할 한 마디를 던진다. “같이 갑시다 광교산. 아, 임금님을 구하러 가는 건 아니오.” 유길채가 은애하는 ‘그 놈’이지만 아무래도 죽는 꼴 보기엔 아까워 보였던 모양이다.

전투 후 부상당한 연준과 함께 찾은 구호소에서 장현은 길채와 재회한다. 그곳에서 경은애(이다인 분)로부터 길채도 모르는 길채의 속마음을 전해 듣는다. 길채가 연준을 아끼는 마음은 남정네를 향한 마음이 아니며 전쟁 소식이 전해진 당시 길채가 가장 먼저 바라본 이는 장현 자신이었다는 말.

장현은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는데 님과 남 사이엔 ‘주저할 섬’이 있으니 섬의 시간을 가져보자고 길채에게 제의한다. 노랫말과 연애를 의미하는 시쳇말 ‘썸’을 차용한 언어유희가 재밌다.

어쨌거나 전황은 안좋아지고 보급대가 습격 당해 마지막 전투를 앞둔 시점. 다 죽자는 판이니 떠나자는 장현의 제의를 연준이 “내 죽을 자리는 여기”라고 거절한 것 까진 좋았다. 그런데 이 놈 연준은 장현의 손을 잡으며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제 여길 떠나 몸을 보존하십시오. 그간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니. 현실주의자를 가장한 로맨티스트 장현의 발길 묶기에 정통한 걸 보면 연준은 무해한 유생 얼굴을 한 절정의 사기꾼같다.

장현은 “우리 모두 죽음으로써 전하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지휘관의 헛소리를 일축하고 이기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청군 시체로 위장해 일거에 적 지휘부를 타격하는 장현의 방법은 잘 먹혀 들어가 근왕군은 대승을 거둔다. 대승을 거두지만 보급차질로 부대는 해산하는데 장현의 활약을 눈여겨본 내시부 상호 표언겸(양현민 분)은 장현을 콕 집는 눈길로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인원을 모집한다.

장현은 애써 외면하는데 이번에도 연준이 나선다. 할만큼했다 싶어 떠나려는 장현을 막아서는 표언겸. 연준도 면목없지만 장현이 도와주길 바라는 눈치다. 오랑캐 칼날보다 날카롭게 폐부를 찔러오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렇게 남한산성에 들어 소현세자를 만나는 이장현. 하지만 그 만남은 시작부터 삐끗했다.

승병의 활약을 “승려들이 이럴 땐 쓸모가 있구만” 정도로 치부하는 세자와 “예, 저하 전쟁이 나니 까까머리 중들이 쓸모가 생겼습니다. 이 전에야 양반네들 두부랑 종이나 만들어주다가 툭하면 얻어터지는 일 말고 무슨 쓸모가 있었겠습니까. 헌데 참 이상하죠? 나라에선 이리도 중들을 무시하는데 왜 중들은 나라에 무슨 난리만 나면 그 민머리를 반짝거리도록 목숨 걸고 나서는지”라는 대꾸까진 넘어갔다.

하지만 “우리 전하께선 백성들보다 먼저 몸을 피하실만큼 기민하신 분이니..”라고 덧붙이다 급기야 날아든 벼루에 맞아 머리가 깨지는 이장현이다.

그럼에도 칸의 친정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청군진영에 잠입하는 이장현. 종묘사직 따윈 아랑곳하지 않지만 백성을 걱정하는 휴머니스트 이장현의 본색이다. 비록 이장현으로선 본인 표현 “이런 젠장”할 상황이지만.

드라마 도입부 은밀히 전해진 소현세자 사초 속 이장현은 ‘군관의 무리 중 군관답지 못한 이’, ‘세자를 미혹하여 그릇된 일에 담기게 한 이’로 표현돼 있었다.

결국 이 시대의 이단아는 본인 의중과는 상관없이 소현세자의 심중에 개혁과 애민의 씨앗을 심은 장본인으로 그려질 모양이다. 이장현으로선 유길채의 우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였을 뿐인데, 유길채란 한 여인네 마음에 담은 일이 이렇게 거국적인 일이 될 줄이야.

어쨌거나 이장현이 “이런 젠장” 하면 할수록 드라마는 재미에 가속이 붙으니 끝날 때까지 이장현의 투덜거림은 계속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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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김재동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