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CU가 새 도시락을 매대에 올리기 전, 실제 소비자 대신 인공지능(AI)에게 먼저 반응을 묻기로 했다.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282330)은 최근 AI 스타트업 인텔리시아와 손잡고, 사람을 조사하지 않고도 신제품·가격·프로모션 반응을 예측하는 'AI 합성소비자' 기술을 상품 기획과 매장 운영에 도입하기로 했다.
설립된 지 1년 반밖에 안 된 신생 스타트업이 유통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2월 문을 연 인텔리시아는 'AI 합성소비자(AI Synthetic Consumer)'를 앞세운 회사다. 사람을 대상으로 설문하지 않고, AI로 가상 소비자를 만들어 신제품에 대한 반응을 예측한다.
회사를 이끄는 백승국 대표는 소비자에게 맞춤 콘텐츠·광고 추천 기업 '데이블'의 공동창업자다. 그는 2021년 11월 데이블을 야놀자(현 놀유니버스)에 기업가치 2000억원 규모로 매각한 주역이다. 3년 겸업 금지가 풀리자 일주일 만에 다시 창업에 뛰어들었다. 데이블이 사람이 읽은 텍스트로 취향을 읽어 기사를 추천하는 기술을 가진 회사였다면, 이번엔 방향을 반대로 돌렸다. "사람이 남긴 데이터로 가상의 소비자를 만들어, 그가 신제품 과자나 마케팅 문구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취향을 거꾸로 찾아낸다"는 것이 백 대표의 설명이다.
지난 15일 서울 송파구 인텔리시아 본사에서 백 대표를 만났다. 그는 "설문조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첫 번째 디딤돌일 뿐"이라며 "궁극적으론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들의 의사결정 실패와 그로 인한 비용을 줄이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 CU·CJ가 택한 합성소비자, 사람 선택과 90% 같아
인텔리시아가 가장 깊게 파고든 곳은 식품·소비재다. 올 상반기에만 100건의 개념검증(PoC)을 진행했고, 재현율(사람의 응답 순위·비율을 얼마나 똑같이 맞히는가)이 1분기 89%, 2분기 91%까지 올라왔다. 이를 진행한 기업 중 약 50개사가 유료 고객사로 전환됐다. BGF리테일을 비롯해 CJ제일제당(097950), 풀무원(017810), 퍼시스그룹, LG유플러스(032640), CJ푸드빌, CJ프레시웨이(051500), 교원, 대상(001680), 상미당홀딩스(옛 SPC), 컬리 등이다.
'미국 국민 수세미'로도 불리는 '스크럽대디'의 국내 시장 공략에도 인텔리시아 공이 컸다. 이 회사 신제품 콘셉트 조사에서 디자인·차별성 지표는 높게 나온 반면 구매 의향은 유독 낮았다. 백 대표는 "구매 의향만 낮게 나온 합성소비자 20명을 곧바로 다시 불러 인터뷰했더니 '너무 비싸다'는 답이 나왔다"며 "가격을 바꿔가며 물어 '1만1000원까지는 사겠지만 그 이상은 급락'하는 지점까지 찾아냈다"고 했다. 고객사 측은 '그래도 이 가격에 팔 방법을 찾아달라'고 나섰다. 추가 조사를 통해 나온 답은 "스크럽대디는 매일 쓰는 일상용품이 아니라 주방의 오브제"라는 인사이트였다. 손님에게 보이는 곳엔 예쁜 스크럽대디를, 안 보이는 곳엔 기존 수세미를 함께 쓴다는 것이다. 백 대표는 "온라인에서 기존 수세미 브랜드와 스크럽대디 제품을 동시에 언급하는 사람은 없지만, AI는 데이터 속 단어 사이의 거리를 계산해 사람도 모르는 교차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 500명 조사? 더 정교하게, 사흘이면 된다
핵심 경쟁력은 시간과 비용이다. 전통적 리서치는 500명 조사에 두 달이 걸리고 비용은 약 2000만원이 들어간다. 같은 규모의 합성소비자를 만든다면, 사흘간 500만~600만원이면 된다. 무엇보다 같은 응답자를 곧바로 다시 불러 "왜 그렇게 답했느냐"를 반복해 파고들 수 있다. 스크럽대디 조사처럼 한 번의 조사가 원인 인터뷰와 가격 민감도 조사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이 사람 조사로는 어렵다. 백 대표는 "신제품 트렌드가 빨라져 3~4주 안에 출시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달짜리 조사로는 타이밍을 놓치는 것이 기업들이 AI 소비자에게 주목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경쟁력은 '솔직함'이다. 사람은 실제 지갑을 여는 게 아니다 보니 조사에서 후하게 답하는 경향이 있는데, 합성 소비자는 그런 '거품'이 덜하다는 것이다. 백 대표는 15만원대 위스키 출시 조사를 예로 들었다. 그는 "사람에게 물으면 '매주 사겠다'고 답하는데, 이걸 근거로 수요를 예측하면 실제의 수십 배로 부풀려진다"며 "반면 합성소비자는 '기존에 마시던 3만~5만원대 위스키가 있으니, 이건 1년에 한 번 특별한 날에나 사겠다'는 식으로 냉정하게 답한다"고 했다. 구매 빈도나 구매 의향처럼 소비자가 감정적으로 답하기 쉬운 항목에선 AI가 실제와 더 유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진출에서도 강점이 두드러진다. 최근 식품·소비재 기업들은 신제품을 낼 때 국내와 해외 시장을 처음부터 함께 겨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사람으로 조사하면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뛴다. 백 대표는 "소비자 500명 조사를 미국에서 하면 비용이 약 1억원까지 뛴다"며 "문항 번역이 맞는지 검증하고 현지 패널을 구하는 데만 몇 배의 시간과 돈이 든다"고 했다. 합성 소비자는 이런 부담 없이 여러 나라를 동시에 빠르게 검증할 수 있다. 인텔리시아는 이미 12개국 패널을 구축해 전체 조사의 10% 이상을 해외 조사로 진행하고 있다.
다만 이 기술은 온라인 '발화량(언급량)' 데이터에 기반한다는 한계가 있다. 백 대표는 "선호하는 야채는 1등부터 7등까지 다 맞혔는데, 싫어하는 야채를 물으면 잘 못 맞힌다"고 했다. 좋아하지 않는 건 애초에 사지 않고 리뷰도 남기지 않으니 학습할 데이터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5㎏ 밀가루 포대처럼 대량으로 팔려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카테고리도 마찬가지다. 백 대표는 "이런 영역은 데이터를 보강, 트레이닝해 2년 안에 재현율을 끌어올리는 게 목표"라고 했다.
◇설문 넘어 매장으로… '구매 접점' 향하는 AI 소비자
인텔리시아는 합성소비자를 설문에만 쓰지 않는다. 지난 5월 선보인 '파라스토어(ParaStore)'는 현실과 같은 매장을 가상에 구현한 뒤, 여기에 합성소비자를 직접 데려다 놓는 방식이다. 가상 편의점 매대에 신제품을 진열하고, 위치와 프로모션(1+1·포스터·매대 단수)에 따라 구매 반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시뮬레이션한다. 백 대표는 "구매 접점을 통째로 가상 공간으로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CU가 최근 도입한 것도 바로 이 파라스토어다. 양사는 실제 CU 매장을 가상 공간에 구현해 상품 진열과 동선, MD 구성을 사전에 시뮬레이션할 예정이다.
데이블의 사내 벤처로 출발해 지금은 독립한 '스페이스비전에이아이'와의 협업도 진행 중이다. 매장에 카메라를 달아 소비자 동선과 진열 위치별 체류·선호를 분석해온 회사로, 남아프리카공화국·스위스 등 해외에서 다수의 사례를 쌓았다. 백 대표는 "실제 매장에서 쌓인 이 데이터를 파라스토어와 결합할 것"이라고 했다.
백 대표는 인텔리시아를 리서치 회사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는 "기업들이 신제품 100개를 내면 90개는 사라진다"며 "이런 의사결정 실패와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이어 "설문은 첫 번째 디딤돌일 뿐, 다양한 기업의 의사결정을 돕는 글로벌 시뮬레이션 회사가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