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차로 5시간 떨어진 스카이섬. 섬 북서쪽 하포트(Harport) 호수 기슭에는 섬에서 가장 오래된 싱글몰트 위스키 증류소가 자리 잡고 있다. '경사진 바위'라는 뜻의 탈리스커(Talisker)가 1830년부터 200년 가까이 위스키를 만들어 온 곳이다.
지난달 31일(현지 시각) 증류소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감각은 후각이다. 오래 숙성된 장독대 뚜껑을 연 것처럼,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신선하면서도 강렬한 바다향이 증류소 전체에 묵직하게 퍼져 있어 코가 가장 먼저 증류소에 들어간 느낌이다. 덕분에 탈리스커가 강조하는 '바다에서 만든 위스키(made by the sea)'라는 브랜드 설명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다. 냄새로 증류소를 느낀 다음에야 원시 지구의 우람한 근육인 컬린(Cuillin) 산맥이 눈에 들어온다.
강한 피트(peat)향으로 유명한 탈리스커는 과일, 소금, 후추 맛을 독특하게 조합해 오랫동안 컬트(cult)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위스키 브랜드로, 매년 전 세계적으로 320만병 이상이 판매되고 있다.
이곳에서 위스키가 생산된 탈리스커의 역사는 18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코틀랜드 에익섬(Eigg) 출신인 휴, 케니스 맥아스킬(Hugh&Kenneth MacAskill) 형제가 처음 증류소를 세웠다. 하지만 이곳 증류소가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50년이 더 지나서다. 운영난으로 여러번 주인이 바뀐 탈리스커는 1880년대 가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물섬'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를 쓴 영국 유명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탈리스커에 "위스키의 왕(The King o'drinks)"이란 찬사를 보냈다.
이완 건(Ewan Gunn) 탈리스커 수석 글로벌브랜드 담당은 "미국 버번위스키는 독특한 당화 과정으로 차별화했고, 아이리시위스키는 독보적인 캐스크(숙성) 과정을 앞세우지만 스카치위스키는 스코틀랜드 전역에 있는 마을과 여러 세대에 걸쳐 위스키를 만든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며 "스카치위스키는 장소와 사람에 관한 위스키"라고 말했다. 깨끗한 자연과 스코틀랜드 증류소가 오랫동안 발전, 유지해 온 기술이 스카치위스키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스카치위스키를 다른 위스키와 구별하는 강렬한 특성 중 하나는 '피트향'이다. 스코틀랜드 증류소는 젖은 맥아를 건조할 때 피트, 우리말로 이탄(泥炭)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땔감으로 피운 불로 훈연한다. 이탄은 쉽게 말해 진흙 상태의 석탄인데, 스코틀랜드 내 매장량이 많다. 훈연 과정에서 향이 들어가고, 피트가 정화한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스카치위스키에는 강한 피트향이 배어있다.
위스키를 만드는 재료는 보리와 물, 이스트 단 세 개다. 세 가지 재료를 배합해 최소 3년, 길게는 수십년 오크통에서 숙성해야 인고의 결정체가 만들어진다. 가장 첫 단계는 보리를 물에 적셔 싹을 틔우는 맥아 제조(몰팅·malting) 과정이다. 피트로 정화된 스코틀랜드 천연수에 보리를 넣고 불린 뒤, 맥아를 다시 말린다. 물은 증류소 뒤에 있는 호크 힐(Hawk Hill) 지하샘에서 끌어올린다. 이탄을 때 맥아를 말린 뒤 1960년대부터 사용해 온 포르테우스 분쇄기(Porteus Mill)로 맥아를 잘게 부순다(miling).
잘게 부서진 맥아는 다시 끓인 물과 합쳐진다. 처음에는 63.5℃ 물과 섞은 뒤 두 번째는 75℃ 물이 주입된다. 마지막으로 85℃ 뜨거운 물과 섞어 당화(mashing) 공정을 거친다.
이렇게 만들어진 맥아즙은 발효통(washbacks)에서 효모와 함께 발효된다. 이전 공정 단계보다 온도가 높은 발효 공간에 들어서니 발효되고 있는 맥아즙의 구수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소나무(Oregon pine)로 만들어진 발효통은 지름 4m, 깊이 5m에 이른다. 지금은 많은 증류 업체가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발효통을 사용하고 있지만, 탈리스커는 여전히 나무통을 고수하고 있다.
이 발효 기간에 따라 위스키 맛이 달라진다. 발효 기간이 짧을수록 곡물, 견과향이 강하고, 발효 기간이 조금 더 지속되면 상쾌한 향으로 발전한다. 숙성 시간이 더 길어지면 위스키는 과일 향을 낸다. 땅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곡물이 인고의 과정을 거쳐 과실수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탈리스커 증류소는 발을 디디는 곳 어디나 내셔널지오그래픽 표지를 장식할 만한 천혜의 자연에 둘러싸여 있지만, 아름다운 환경만으로 이 진득한 캐러멜색 액체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탈리스커 관계자는 "물과 보리, 효모가 거치는 매우 극적인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기술과 지식"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의 손길로 탈리스커 위스키의 풍미를 배가시키는 절정의 단계가 바로 증류 과정이다. 발효 이후 위스키 원액을 증류하는 단계에 이르는데, 탈리스커는 독특한 증류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탈리스커는 1928년 이전까지 3중 증류 시스템을 이용해 풍미를 높여왔다. 1928년부터는 2회 증류 방식을 도입했지만, 웜통(worm tubs)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이용해 증류 횟수를 늘린 효과를 내고 있다.
이곳 양조장에는 1960년 화재 이후 이전과 동일하게 제작된 워시증류기(wash stills) 2개와 스피릿증류기(spirit stills) 3개가 있다. 이 사이에 U자 모양의 독특한 증류 방식이 더해지는데, 이 과정은 탈리스커 위스키의 무게감을 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공정은 촬영이 허가되지 않았다.
양조장 밖에 있는 거대한 둥근 나무통은 찬물을 채워 구리관을 식히는 역할을 하는데, 증류된 기체가 이 구리관을 지나며 액체로 바뀌는 응축 과정을 거친다.
많은 양조장이 현대적이고 효율적인 열교환기(shell and tube) 방식으로 바꿨지만, 탈리스커는 웜통을 사용하는 오래된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웜통은 구리 함량이 높아 훨씬 더 빨리 마모되고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며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다. 하지만 높은 품질의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겠다는 것이 탈리스커의 원칙이다.
이렇게 얻은 원액은 미국산 참나무로 만든 오크통에서 숙성된다. 이 오랜 과정을 거친 후에야 보리와 물은 스코틀랜드 토착민인 게일족이 '생명의 물'이라고 불렀던 스카치위스키로 태어난다.
탈리스커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충분히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위스키로 유명하다. 탈리스커는 글로벌 주류업체 디아지오 소속으로, 국내에도 수입돼 판매되고 있다.
이완은 "이 절묘한 액체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기 때문에 엄격하게 정해진 규칙은 없다"면서도 "탈리스커는 풍미가 뛰어나 다른 재료가 풍미를 가려지는 일이 거의 없어 대담하게 선택할 수 있다. 지금 막 껍데기를 벗긴 굴과 탈리스커 한 방울은 특별히 훌륭한 작용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탈리스커의 대담한 강렬함은 한국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라고 덧붙였다.
탈리스커 위스키는 10년과 18년, 25년이 주력이다. 특히 10년 위스키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강렬한 스모크향과 바다의 단맛, 목 넘김 전 느낄 수 있는 섬세한 매운맛을 즐길 수 있는 싱글몰트 위스키로 정평이 나 있다.
이 밖에도 30년 위스키와 셰리통에서 숙성한 스카이(Skye), 스톰(Storm) 위스키, 포트통에서 추가로 숙성한 포트 루이지(Port Ruige) 위스키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