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림(136480)그룹이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를 인수한 지 86일, 유통가에서 나오던 '초저가 독일식 알디(ALDI) 모델' 구상은 폐기 수순을 밟는 모양새다. 20년 전 제조업식 원가 절감 마인드로 뛰어들었다가 고배를 마신 '700마켓'의 흑역사를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이 기억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림은 초저가 경쟁보다는 계열사 NS홈쇼핑의 농수산물 소싱 역량과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퀵커머스(즉시 배송)를 결합한 '신선 농산물·건기식 특화 플랫폼'에 집중하고 있다. '싸게 팔기만 하는' 유통으로 쓴맛을 본 하림이 '신선하게 전달하는' 유통으로 플랫폼 전략을 달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15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하림 계열사 NS홈쇼핑은 내달 16일 전북 익산에서 열리는 'NS푸드페스타 2026' 에 '홈플러스 익스프레스관'을 신설하고 이를 홍보할 계획이다. 지난 6월 NS홈쇼핑을 통해 1206억원에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를 인수한 하림이 유통망 통합 후 공식 무대에서 선보이는 첫 번째 무대다. 하림 김홍국 회장이 이날 행사에서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에 대한 중장기 전략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1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한 김 회장이 어떤 카드를 제시할지 유통업계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앞서 김 회장은 지난 5월 NS홈쇼핑 창립 25주년 비전선포식에서 "유통의 경쟁은 채널의 경쟁이 아닌 경험의 경쟁"이라며 온·오프라인 연결 플랫폼을 강조했다.
◇ 직접 만들어 싸게 판다던 '700마켓'은 실패
업계가 김 회장의 전략 발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하림의 오프라인 유통 도전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의 오프라인 유통 잔혹사는 지난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하림은 독일의 세계적인 초저가 할인매장인 '알디'와 '리들(LIDL)'를 벤치마킹해 '700마켓'을 선보였다. 품목 수(SKU)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매장 운영비를 낮춰 파격적인 가격으로 승부를 걸었다.
하지만 대형마트와 '규모의 경제' 싸움에서 밀리며 결국 6년 만에 이마트(139480)에 헐값으로 넘겨야 했다. '직접 만들어 싸게 파는 유통'이라는 제조업식 마인드에 집착하다 고배를 마신 것이다.
이후 김 회장은 본업인 생산·제조 영역에서 독보적인 원가 절감 밸류체인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 1990년대부터 사료, 종계, 사육, 도계, 육가공으로 이어지는 축산 수직계열화를 완성했고, 2015년에는 사료 원료 수입 해상운임을 내부화하기 위해 팬오션을 인수했다. 2018년에는 '더미식' 브랜드를 론칭하며 프리미엄 HMR 제조 영역으로까지 전선을 넓혔다.
인수 직후 유통업계에서는 김 회장이 과거 실패했던 '알디식 비용 절감과 PB(자체브랜드) 중심 모델'을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에 다시 적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인수 85일이 지난 현재 하림의 행보는 시장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 신선식품과 퀵커머스 강점 살려 재도전
NS홈쇼핑 측은 알디식 초저가 모델에 대해 "도심형 SSM(기업형 슈퍼마켓) 환경에서는 시의성이 다한 고전적 방식"이라고 선을 그었다. 대신 농수산물 소싱 역량과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퀵커머스를 결합해 신선식품과 웰니스에 특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은 조직적·물리적 결합에서 나타나고 있다. 판교 NS홈쇼핑 본사 5층으로 입주를 완료한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상품기획(MD) 조직은 NS홈쇼핑의 농산물·식품 전문 MD들과 상주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양사 MD들은 NS홈쇼핑이 축적한 농가 직거래 네트워크를 오프라인 매장으로 이식하고 있으며, 농협과 협업으로 시너지 극대화를 모색 중이다.
NS홈쇼핑은 또 대표 건기식 자체 브랜드(PB)인 '엔웰스' 실속형 5종을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124개 점포 매대에 전격 입점시켰다. 기존 SSM에서 보기 힘들었던 하림 계열의 생오리, 프리미엄 돼지고기, HMR 제품군을 매장 전면에 배치하고, 근거리 즉시배송 주문 마감 시간도 오후 11시까지 연장해 퀵커머스 거점 기능을 강화했다.
유통업계에서는 하림이 '원가 절감'에 매몰돼 유통 서비스의 특수성을 간과한다면 이번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인수 역시 또 다른 비싼 실패작으로 기록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가 이마트와 같은 대형마트나 온라인 플랫폼인 쿠팡과 경쟁하려면 신선함을 경쟁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이어 "하림이 제조 현장에서 쌓은 원가 절감 노하우를 유통에 잘 접목시키기를 기대한다"면서도 "문제는 서비스 품질을 낮추면서까지 원가를 줄이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NS홈쇼핑 관계자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당장의 목표는 매출 회복"이라며 "공룡 쿠팡과 이마트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사이에서 틈새시장을 파고들겠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