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독일에서 문을 연 예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는 현대 디자인의 실험장이었다. 건축과 미술, 공예의 경계를 허물고 화려한 장식 대신 기능과 구조를 중시했다. 철강과 유리처럼 산업시대를 상징하는 재료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은 학교를 넘어 현대 예술과 건축, 디자인을 관통하는 하나의 철학을 가리키는 말로 확장됐다.

독일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는 이 학교의 마지막 교장이었다. 나치 정권의 압박으로 바우하우스가 1933년 문을 닫은 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아머공과대학(현 일리노이공과대학·IIT)의 건축 교육을 이끌었다.

시카고에서 그의 건축은 새로운 환경과 만나 한층 확장됐다. 유럽에서 탐구한 단순한 형태와 정확한 비례, 구조를 숨기지 않는 건축에 미국의 발전된 철강 기술과 도시의 규모가 더해졌다. 이를 상징하는 건물이 1956년 완공된 IIT의 'S. R. 크라운 홀'이다. 건물 외부의 8개 철제 기둥과 4개의 대형 철제 거더(구조물)로 지붕을 떠받쳐 내부에 기둥 없는 거대한 공간을 만들었다. 철의 구조와 유리, 공간의 비례 자체가 건축의 미학이 됐다. 유럽에서 다듬어진 철학이 신대륙의 환경을 만나 새로운 언어로 구현된 것이다.

그래픽=정서희

와인에도 이와 비슷한 여정이 있다. 프랑스 루아르 상세르(Sancerre)에서 10대에 걸쳐 와인을 만들어 온 부르주아(Bourgeois) 가문은 소비뇽 블랑과 피노 누아를 재배할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12년에 걸쳐 세계 곳곳을 살펴본 끝에 이들이 선택한 곳은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 남섬 북동쪽의 말보로(Marlborough)였다. 그곳에 세운 와이너리가 '끌로 앙리(Clos Henri)'다.

부르주아 가문은 상세르의 샤비뇰(Chavignol)을 기반으로 와인을 만들어 온 집안이다. 특히 소비뇽 블랑과 피노 누아를 각기 다른 토양의 특성에 맞춰 표현하는 데 집중해 왔다. 이들이 뉴질랜드에서 만들고자 한 것은 '포도가 자라는 땅의 성격을 와인에 담는다'는 철학을 전혀 다른 자연환경에서 구현하는 것이었다.

끌로 앙리는 말보로 와이라우 밸리(Wairau Valley)에 자리 잡았다. 이곳은 서로 다른 빙하기와 지질 활동이 흔적을 남긴 땅이다. 포도원에는 성격이 다른 세 종류의 토양이 존재한다. 부르주아 가문은 상세르에서 200년 넘게 축적한 재배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에서 소비뇽 블랑과 피노 누아를 키우기 시작했다.

재배에는 프랑스에서 익힌 방식을 적용했다. 끌로 앙리 에스테이트 소비뇽 블랑 포도밭의 식재 밀도는 헥타르(㏊)당 4000그루다. 일반적인 말보로 포도밭보다 촘촘하게 심어 포도나무 사이의 경쟁을 유도한다. 지나친 생장을 억제하고 뿌리가 물과 영양분을 찾아 토양 깊숙이 뻗도록 하기 위해서다. 말보로의 자연은 최대한 그대로 받아들인다. 관개를 최소화하고 유기농 방식으로 포도밭을 관리한다.

'끌로(Clos)'라는 이름에는 프랑스에서 가져온 전통이 담겼다. 프랑스어로 담이나 벽 등으로 둘러싸인 포도밭을 의미한다. 끌로 앙리는 포도밭과 와이너리, 셀러를 한 부지에 두고 하나의 포도원, 즉 단일 '도멘(domaine)' 안에서 와인을 만든다. 오래된 프랑스 와인 문화를 뉴질랜드의 땅 위에 옮겨놓은 셈이다.

'끌로 앙리 에스테이트 소비뇽 블랑(Clos Henri Estate Sauvignon Blanc)'은 이런 철학을 비교적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와인이다. 세 가지 토양에 자리한 여러 구획에서 수확한 소비뇽 블랑을 조합해 만든다. 하나의 토양이나 특정 구획을 강조하기보다 끌로 앙리 포도원 전체의 다양성을 한 병에 표현하기 위해서다.

수확한 포도는 부드럽게 압착하고 압착 정도에 따라 얻은 주스를 나눠 관리한다. 3일간 침전시킨 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해 과실의 순수한 향과 풍미를 살린다. 발효를 마친 와인은 고운 효모 찌꺼기와 함께 3개월 동안 숙성한다. 이 과정에서 효모 찌꺼기를 주기적으로 저어 와인을 자연스럽게 안정시키고 질감과 복합미를 더한다.

말보로 소비뇽 블랑은 일반적으로 강렬한 열대과일과 시트러스, 허브 향과 선명한 산미로 잘 알려져 있다. 끌로 앙리가 추구하는 방향은 조금 다르다. 과실 향의 강도만 강조하기보다 서로 다른 토양에서 비롯되는 질감과 구조, 산도와 미네랄의 균형을 중시한다.

잔에 따르면 만다린과 유자꽃을 연상시키는 밝은 시트러스 향이 먼저 올라온다. 입에서는 파인애플과 복숭아, 레몬 껍질의 풍미가 이어진다. 생기 있는 산도가 풍부한 과실 풍미를 받치고, 마지막에는 미네랄의 느낌이 길게 남는다. 끌로 앙리 에스테이트 소비뇽 블랑은 '2026 대한민국 주류대상' 신대륙 화이트 와인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국내 수입사는 나라셀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