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럭셔리(Luxury)란 온전한 공간과 사용자가 느낄 수 있는 편안함(Comfort) 그 자체다."
이탈리아의 하이엔드 명품 가구 브랜드 '박스터(Baxter)'를 이야기할 때 디자이너 파올라 나보네(Paola Navone)를 빼놓기는 어렵다. 그는 2002년 박스터와 협업을 시작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전성기를 이끌어온 인물로 꼽힌다.
박스터는 국내에서 에이스침대가 수입하고 있다. 지난 5월 14일 서울 강남 에이스에비뉴에 있는 박스터 쇼룸에서 조선비즈와 만난 나보네 디자이너는 최신 트렌드를 좇기보다 사용자가 집에서 가장 포근하게 쉴 수 있는 가구를 만드는 것이 확고한 철학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973년 이탈리아 토리노 폴리테크니코를 졸업한 후 건축, 인테리어, 산업 디자인을 넘나들며 활약했다. 크놀 인터내셔널(Knoll International)의 가구 컬렉션 개발을 맡은 것을 비롯해 알레씨(Alessi), 나투찌(Natuzzi), 스와로브스키(Swarovski) 등 세계적인 브랜드와 협업했다. 박스터에서는 가죽으로 패브릭 원단 같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독창적인 가공 방식을 도입하며, 박스터가 변화를 선도하는 브랜드로 안착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초 고전적이고 경직된 스타일의 가죽 가구를 만들던 박스터가 나보네를 만나 세계적인 브랜드로 빠르게 성장한 비결은 무엇일까. 나보네는 22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이어온 협업의 원동력으로 현장 장인들과의 유기적인 소통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연함을 꼽았다. 그는 "디자인의 형태를 도면으로 그리는 것보다 공장의 장인들과 직접 부딪히고 대화하며 원하는 질감과 안락함을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 박스터의 진짜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이엔드 가구일수록 유행을 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가구 브랜드가 쏟아지는 시장인 만큼 차별화된 정체성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유행을 의식하고 만든 디자인은 시장에 나오는 순간 이미 '늙은 디자인'이 된다"며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단순함과 아늑함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가 디자인한 박스터의 대표 모델이자 베스트셀러인 '부다페스트(Budapest)' 소파는 출시된 지 22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전나무와 포플러나무로 구성된 골격에 거위털 쿠션을 매치해 가죽 특유의 뻣뻣함을 깨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안락함을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박스터의 제품이 사용자의 삶에 녹아들어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ㅡ2002년부터 박스터와 협업을 이어오고 있다. 첫 시작이 궁금하다.
"사실 협업 전에 내가 알던 박스터는 창립자 루이지 베스테티와 그의 조카 파올로 베스테티가 운영하는, 다소 고전적인 가죽 가구를 만드는 회사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술을 한잔하러 내 집을 찾아와 박스터를 위한 디자인을 해달라고 제안했는데,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당시 박스터의 제품들은 페라리 자동차 시트나 오피스 의자처럼 너무 딱딱했고, 나는 그런 가죽 가구를 좋아하지 않아 내 집안에도 들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끈질긴 설득에 '내가 집에서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고 함께 살 수 있는 부드러운 가구를 만들겠다'는 조건으로 시도하게 됐다. 가죽의 무거운 갈색 톤을 걷어내고 아름다운 그레이 톤과 부드러운 질감을 구현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ㅡ첫 컬렉션부터 반응이 바로 왔나.
"전혀 아니다. 전시회에 제품을 냈는데 그리스 출신의 수입업자 한 명이 모든 제품을 사 간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고객들의 반응이 아예 없었다. 파올로에게 좋은 친구로 남되 일은 그만하자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해보자고 했다. 이후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서 모로코풍 양모와 다채로운 컬러를 매치해 훨씬 더 크고 아늑한 부스를 선보였다. 그때부터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이후 22년 동안 매년 내 컬렉션의 매출이 늘고 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ㅡ디자인할 때 장인들과의 소통을 매우 강조하는데, 제품에 얽힌 일화가 있다면.
"베스트셀러인 부다페스트 소파를 만들 때 가죽 쿠션이 정형화되지 않고 아래로 자연스럽게 무너져 내리는 형태를 원했다. 하지만 장인들은 가죽을 그렇게 다루는 방식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직선으로 재단하면 뻣뻣하고, 잘못 자르면 과하게 주저앉기 때문이다. 완벽한 안락함을 잡기 위해 공장을 수없이 오가며 대여섯 번 넘게 시제품을 수정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은 많은 비용이 들고, 특정 단계에 도달하기까지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다.
내가 요구하는 것이 장인들에게는 상상 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내부적인 도전이었다. 그래서 직접 시도해야 했고, 서로를 신뢰해야 했다. 제품이 잘 팔리기 시작하자 장인들도 점점 확신을 갖고 에너지를 쏟기 시작했다."
ㅡ작품을 만들 때 가장 신경 쓰는 기준은 무엇인가.
"편안함이다. 가죽의 종류나 외형의 형태, 내부 충전재 등 다른 모든 요소는 편안함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지친 하루를 보낸 뒤 집에 돌아왔을 때 포근하게 감싸안아 주는 느낌을 주고 싶다. 매우 세련되고 단순하지만 안락해야 한다."
ㅡ편안함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가죽 종류가 따로 있나.
"특정 가죽 하나만을 꼽을 수는 없다. 편안함이란 가죽의 종류, 제품의 형태, 그리고 내부 충전재의 느낌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완벽하게 결합할 때 완성된다."
ㅡ디자인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나. 마이애미, 시카고 등 도시 이름을 제품명에 자주 붙이는데 여행과 관련이 있나.
"영감은 모든 곳에서 받는다. 우선 정보와 이미지를 24시간 내내 멈추지 않고 수집한다. 밀라노에서 서울로 여행할 때뿐만 아니라 동네 슈퍼마켓이나 플리마켓에 갈 때도 항상 스펀지처럼 주변을 관찰하고 흡수한다. 거대한 바스켓에 정보들을 무질서하게 모아두었다가 디자인이 필요할 때 빠르게 꺼내 쓴다.
제품에 도시 이름을 붙이는 건 초창기에 파올로 대표와 매번 어렵고 복잡한 이름을 고민하는 대신 지리적인 명칭을 붙이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끝나면 제품의 느낌과 연결되는 도시 이름을 매칭한다."
ㅡ최근 소비자들은 트렌드에 매우 민감하다. 트렌드와 클래식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나.
"나는 트렌드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트렌드를 좇아 디자인하면 만드는 순간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 옳다고 느끼는 것을 만든다. 내가 지향하는 가구는 언제 보아도 단순하고 편안한 가구다. 유행을 따르지 않아야 시간이 흘러도 낡아 보이지 않는다."
ㅡ박스터는 하이엔드 럭셔리 브랜드로 꼽힌다. 당신이 생각하는 진짜 럭셔리란 무엇인가.
"나에게 럭셔리는 편안함과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이다. 오늘날 럭셔리라는 단어 자체는 지나치게 소모되고 낡은 표현이 됐다. 더 이상 거창한 수식어로서의 럭셔리를 논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ㅡ소비자들이 당신의 박스터 제품을 어떻게 느끼고 기억해 주길 바라나.
"소비자들이 제품을 구매해 집으로 가져간 뒤, 그 위에 앉아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완벽한 편안함을 느끼면 좋겠다.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사는 가구가 아니라, 시간이 흘러 조금 흠집이 나고 손때가 묻더라도 개의치 않고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진짜 자기 것처럼 느껴지는 가구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