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나푸가타(Donnafugata)는 이탈리아어로 '도망친 여인' 또는 '피신한 여인'을 뜻한다. 이름의 뿌리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폴리를 떠나 시칠리아로 몸을 피해야 했던 한 왕비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인공은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4세의 왕비였던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다. 그는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매였다.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는 나폴레옹의 위협을 피해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 섬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왕비가 복잡한 도심을 떠나 시칠리아 내륙의 콘테사 엔텔리나지역에 머물게 되면서, 현지 주민들은 밤을 도와 피신해 온 고귀한 여인을 가리켜 '돈나푸가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일화는 이탈리아 국민작가 쥬세페 토마시의 소설 '레오파드(Il Gattopardo)'에도 등장한다. 소설 속 주인공 살리나 공작 가문이 무더운 여름을 보내기 위해 찾는 유서 깊은 시골 영지의 이름이 돈나푸가타로 묘사되면서, 이 단어는 시칠리아의 역사 및 문학을 관통하는 상징적인 코드로 자리 잡았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는 1963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역사적 서사를 와인 브랜드로 승화시킨 것은 시칠리아의 랄로(Rallo) 가문이다. 1851년부터 마르살라 지역에서 와인을 만들어 온 랄로 가문의 자코모 랄로(Giacomo Rallo)와 그의 아내 가브리엘라 안카 랄로(Gabriella Anca Rallo)는 1983년 콘테사 엔텔리나의 포도밭을 기반으로 돈나푸가타를 설립했다.
돈나푸가타는 설립 당시 콘테사 엔텔리나와 마르살라를 중심으로 와인을 생산했지만, 이후 판텔레리아, 에트나, 비토리아 등으로 생산지를 넓혔다.
시칠리아는 해안과 언덕, 화산 지대, 섬까지 서로 다른 재배 환경을 품은 곳이다. 돈나푸가타는 이 다양한 자연 조건을 한 브랜드 안에서 보여주는 생산자다. 콘테사 엔텔리나는 서부 시칠리아 내륙의 언덕 지대, 판텔레리아는 지중해 바람이 강한 화산섬, 에트나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의 사면이라는 점에서 각각 다른 개성을 지닌다.
와이너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시칠리아 토착 품종의 가능성이다. 돈나푸가타는 2009년 콘테사 엔텔리나에 19개 토착 품종과 30개 바이오타입을 심은 실험 포도밭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국제 품종을 모방하는 데 머무르기보다 섬 고유의 품종과 풍토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다.
안띨리아(Anthìlia)는 돈나푸가타가 처음 만든 와인이다. 첫 빈티지는 1983년으로 와이너리의 출발과 함께한 상징적인 와인이다. 이름 역시 지역의 역사에서 가져왔다. 안띨리아는 로마 시대에 콘테사 엔텔리나 지역의 고대 도시 엔텔라(Entella)를 부르던 이름으로, 와인의 명칭 자체에 시칠리아 서부 내륙의 고고학적 뿌리가 담겨 있다.
안띨리아의 라벨에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여성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돈나푸가타는 이 여성을 고대 서부 시칠리아의 엘리미안 문명처럼 신비롭고 덧없는 존재로 설명한다. 동시에 돈나푸가타의 이름과 로고, 라벨 세계는 공동 창립자인 가브리엘라 랄로의 감수성과도 연결된다. 와이너리 측은 가브리엘라가 브랜드 이름과 라벨의 영감이 된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역사 속 '피신한 여인'의 이미지와, 남성 중심의 와인 산업에서 독자적인 감각으로 브랜드를 일군 여성 창립자의 서사가 겹쳐지는 대목이다.
안띨리아는 시칠리아 DOC 비앙코(Sicilia DOC Bianco) 등급의 화이트 와인이다. 주 품종은 루치도(Lucido)다. 여기에 일부 시칠리아 토착 품종과 국제 품종이 블렌딩된다. 포도는 시칠리아 남서부 콘테사 엔텔리나의 돈나푸가타 소유 포도밭과 인근 재배지에서 나온다. 포도밭은 해발 200~400m의 언덕 지대에 자리하며, 점토질 양토와 온화한 겨울, 건조하고 바람이 부는 여름, 큰 일교차를 특징으로 한다.
양조 방식은 안띨리아의 산뜻한 성격을 살리는 데 맞춰져 있다. 포도를 부드럽게 압착한 뒤, 머스트를 온도 조절이 가능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한다. 이후 최소 두 달간 탱크에서 숙성하고, 병입 후 약 두 달간 추가 숙성한 뒤 출시한다. 오크 숙성을 강조하기보다 과실 향과 산도, 시칠리아 화이트 와인 특유의 짭짤한 미네랄감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안띨리아는 투명하고 밝은 밀짚색을 띤다. 향에서는 감귤류와 흰 과육 과일, 섬세한 꽃 향이 나타난다. 입안에서는 과실 풍미가 신선한 산도와 뚜렷한 염분감으로 이어진다. 생선 요리와 해산물 튀김, 채소 플랑, 신선한 치즈, 흰살 고기와 두루 어울린다. 안띨리아는 '2026 대한민국 주류대상' 구대륙 화이트 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 공식 수입사는 나라셀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