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클링 와인 시장의 기준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샴페인이었다. 하지만 최근 세계 시장에서는 변화가 뚜렷하다. 샴페인이 여전히 프리미엄 스파클링의 상징이긴 하지만 상파뉴 이외 지역에서 만든 크레망, 이탈리아 프로세코, 영국 스파클링 와인, 스페인 까바 등 다른 산지의 전통 방식 스파클링 와인이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고물가와 소비 취향 변화로 '품질과 개성을 갖춘 대안을 찾는 소비자가 늘어난 영향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스페인 페네데스 지역의 까바 생산자 '로저 구라트(Roger Goulart)'가 국내 시장에 소개됐다. 국내 와인 수입사 나라셀라는 지난달 22일 서울 강남구 나라셀라 리저브에서 로저 구라트 세미나를 열고, 최상위 한정판 까바인 '로저 구라트 더 로저 마크 Ⅱ 2017'을 선보였다.
◇ 지하 30m 셀러에서 75개월 숙성
13일 나라셀라에 따르면 더 로저 마크 Ⅱ 2017은 생산량이 5000병 미만인 희귀 한정판이다. 국내에 배정된 물량은 240병으로, 나라셀라 리저브와 직영점에서만 판매된다.
프랑스 샴페인 생산자 협회인 코미테 샹파뉴(Comité Champagne)에 따르면 2024년 샴페인 출하량은 2억7140만병으로 전년보다 9.2% 줄었다. 프랑스 내수 출하는 7.2%, 수출은 10.8% 감소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스페인 까바 업계는 프리미엄 전략을 강화하며 '가성비 스파클링'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있다. 까바는 스페인에서 샴페인처럼 병 안에서 2차 발효를 거쳐 만드는 전통 방식 스파클링 와인이다.
특히 까바 중 상위 등급인 '구아르다 수페리오르(Guarda Superior)'는 장기 숙성과 유기농 생산, 산지 세분화 등을 앞세우며 고급 스파클링 시장에서 입지를 넓히는 중이다. 지난해부터 100% 유기농 기준을 적용해야 하고, 빈티지 표기와 10년 이상 된 포도밭 요건 등을 갖춰야 한다.
로저 구라트는 1882년 스페인 카탈루냐 페네데스에서 시작한 까바 생산자다. 에두아르드 카프데빌라(Eduard Capdevilla) 쿠네(C.V.N.E.) 수출 매니저는 간담회에서 "까바는 법적으로 9개월 이상 병숙성을 거치면 출시할 수 있지만, 로저 구라트는 기본급 와인도 이보다 긴 숙성을 거친다"고 설명했다.
까바는 일반 등급의 경우 9개월 이상 병숙성을 거치면 출시할 수 있다. 로저 구라트의 브뤼 밀레짐은 이보다 반년 가량 더 숙성한 뒤 선보인다. 숙성미와 신선함, 깊이감을 더하기 위해서다.
◇ 토착 품종에 샤도네이·피노누아 더해
로저 구라트의 가장 큰 자산은 지하 셀러다. 깊이 약 30m, 길이 1㎞에 이르는 터널형 셀러는 연중 14~15도 안팎의 온도와 약 85%의 습도를 유지한다. 빛과 진동의 영향을 덜 받는 환경에서 와인이 천천히 익어가는 구조다. 카프데빌라 매니저는 "상파뉴 방식에서 영감을 받아 모든 과정을 손수 작업하며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다"고 했다. 병 안에서 효모와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포는 부드러워지고, 과실 향 위에 브리오슈와 구운 빵, 견과류 같은 숙성 향이 더해진다.
원료 포도는 알토 페네데스(Alt Penedès)에서 나온다. 알토 페네데스는 '높은 페네데스'라는 뜻으로, 해발 350~700m에 이르는 고지대 포도밭을 포함한다.
차별점은 품종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까바의 전통 품종은 차렐로, 마카베오, 파레야다 등이다. 로저 구라트는 이 토착 품종을 중심으로 삼되, 더 로저 마크 Ⅱ 등 일부 고급 라인에는 샤도네이와 피노누아를 더한다. 샤도네이는 와인에 바디감과 폭을 주고, 피노누아는 산도와 구조감을 보태 장기 숙성력을 높인다.
카프데빌라 매니저는 "보통 까바에는 토착 품종만 쓰는 경우가 많다"라며 "스페인의 기후와 토양에서 샤도네이와 피노누아를 기르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제 시장에서 까바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샤도네이와 피노누아 같은 품종이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일부 와이너리들이 이 같은 도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포도를 손으로 수확한다"라며 "산도 유지를 위해 서늘한 이른 아침에 수확한다"라고 말했다.
이번에 국내 출시된 '더 로저 마크 Ⅱ 2017'은 로저 구라트의 숙성 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와인이다. 좋은 빈티지라고 판단되는 해에만 생산된다. 최소 75개월 동안 병 안에서 효모와 함께 숙성한다. 로저 구라트의 또 다른 고급 라인인 '그랑 레세르바 조셉 발스'가 최소 36개월 숙성되는 점을 감안하면 두 배 이상 긴 시간이다.
국내 와인 시장에서 프리미엄 까바는 아직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단계다. 나라셀라가 로저 구라트를 판매하기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더 로저 마크 Ⅱ 같은 한정판을 들여온 것도 이 시장의 가능성을 겨냥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나라셀라 관계자는 "'더 로저(The Roger)' 시리즈는 로저 구라트의 최고급 라인업으로, 이번 더 로저 마크 Ⅱ는 첫 번째 빈티지 '마크 Ⅰ(2013)'에 이어 선보이는 두 번째 에디션"이라며 "프리미엄 까바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겠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