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영국 귀족 사회의 삶을 그린 드라마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에서 식사는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하나의 의식처럼 진행된다. 주인공인 크롤리 가문의 저녁 식탁은 가문의 엄격한 질서와 전통 속에서 이어진다. 연극 같은 식사의 흐름을 열고 닫는 주정강화 와인인 셰리(Sherry)와 포트(Port)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 응접실에 모인 이들은 작은 잔에 담긴 셰리를 마시며 사교를 시작하고, 화려한 만찬이 끝난 뒤 남성들만 남아 포트 와인을 나누며 정치와 경제를 논하는 모습은 20세기 초 상류층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이들에게 주정강화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가문의 부와 국제적 교양, 그리고 변치 않는 전통을 상징하는 문화적 장치였던 셈이다.
셰리와 포트는 각각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발전한 대표적인 주정강화 와인이다. 17~18세기 해상 무역이 확대되면서 와인을 배에 실어 장거리로 운송해야 하는 상황이 늘었고, 알코올 도수를 높여 보존성을 강화하는 기술이 필요해졌다.
발효 중이거나 발효가 끝난 와인에 브랜디와 같은 증류주를 첨가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고, 이 과정에서 발효가 멈추며 당분이 남아 독특한 단맛과 질감이 형성됐다. 도수가 높아진 와인은 장거리 운송에도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시간이 지나며 산화와 숙성을 통해 더욱 복합적인 풍미를 갖게 됐다.
이러한 주정 강화 와인은 대서양 연안의 항구 도시들을 거점으로 각 지역의 환경에 맞춰 진화했다. 포르투갈 도우루 계곡에서는 구조감과 농밀함을 강조한 포트 와인이, 스페인 남부 헤레스에서는 다양한 숙성 방식을 통해 다채로운 스타일을 구축한 셰리가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포르투갈 리스본 남쪽에 있는 세투발 반도(Setúbal Peninsula)는 셰리나 포트와는 또 다른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길을 개척했다. 세투발은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습한 기운과 아라비다 산맥이 선사하는 천혜의 보호막 덕분에 당도와 산미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포도를 생산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다른 주정 강화 와인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모스카텔 드 세투발(Moscatel de Setúbal)'이라는 화려한 아로마를 지닌 품종에 있다. 발효 중간에 주정을 첨가하는 방식은 같지만, 세투발의 양조가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모스카텔 품종이 가진 폭발적인 향을 극한까지 추출하기 위해, 주정 강화 후에도 포도 껍질을 술 속에 담가두는 장기 침용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 스타일을 정립하고 세계에 알린 생산자가 바로 호세 마리아 다 폰세카(José Maria da Fonseca)다. 1834년에 설립된 이 와이너리는 7세대에 걸쳐 이어져 온 가족 경영 생산자로,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중 하나로 꼽힌다. 1849년 포르투갈 최초로 모스카텔 드 세투발 품종을 활용한 와인을 선보이며 지역 와인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주앙 피레스 모스카텔 드 세투발 10년은 이 전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와인이다. 이 와인은 발효 도중 중성 브랜디를 첨가해 발효를 멈춘 뒤 약 5개월 이상 포도 껍질과 함께 침용한다. 이후 압착된 와인과 블렌딩해 나무통에서 장기간 숙성하는데, 블렌드에 사용된 와인은 평균적으로 10년 이상의 숙성을 거친다. 일부는 10~15년에 이르는 숙성 과정을 통해 더욱 깊은 풍미를 형성한다.
잔에 따르면 색은 깊고 농밀한 호박빛을 낸다. 코에서는 오렌지 껍질과 말린 살구, 꿀, 아니스 향이 어우러지며, 숙성에서 비롯된 견과류와 토피의 뉘앙스가 더해진다. 입안에서는 점성이 느껴질 만큼 농밀한 질감과 함께 부드러운 단맛이 길고 안정적으로 이어진다.
이 와인은 다양한 디저트와의 조합에서 특히 강점을 보인다. 초콜릿이나 캐러멜 디저트, 아몬드와 같은 견과류 기반의 디저트와 잘 어울리며, 블루치즈나 푸아그라와 같은 풍미가 강한 음식과도 균형을 이룬다. 단순히 식사의 끝을 장식하는 술이 아니라, 하나의 코스를 완성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2026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주정강화 와인 부문 '베스트 오브 2026'을 받았다. 국내 수입사는 올빈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