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시장에서 케이(K)라면 시장을 둘러싼 국내 기업 간 경쟁이 시작될 전망이다. 팔도가 대표 제품 '도시락'으로 30년 넘게 장악해 온 러시아 시장에 농심(004370)이 현지 법인 설립을 통해 직접 공략에 나선 것이다. 국내에선 농심이 라면 시장 점유율 1위 사업자로 자리 잡고 있지만 러시아에선 팔도가 주도권을 쥔 상태인 만큼, 업계는 러시아 라면 시장 판도 변화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9일 유통·식품업계에 따르면 농심은 오는 6월 러시아 모스크바에 판매법인을 세우고 현지 시장 공략에 나설 계획이다. 러시아를 거점으로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 독립연합국가(CIS) 지역까지 확장하는 '유라시아 전략'의 일환이다. 농심 관계자는 "이번 러시아 진출은 시장 성장성을 보고 판단한 것"이라며 "연평균 10% 안팎의 성장세와 K콘텐츠 열풍에 따른 K푸드 관심을 고려할 때 진출 적기라고 봤다"고 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러시아 라면 시장은 2021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1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2030년 약 10억5000만달러(한화 약 1조5600억원)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러시아의 한국 라면 수입액도 5200만달러(약 773억원)으로 전년 대비 58% 늘었다.
현재 러시아 K라면 시장은 팔도가 선점한 상황이다. 팔도는 1991년 러시아 수출을 시작으로 1997년 블라디보스토크 사무소를 개설하고 1999년 모스크바 사무소를 설립했다. 2005년 이후 현지 공장을 세우면서 생산·유통망을 갖췄고, 약 30년에 걸친 현지화 작업을 통해 시장을 장악해 왔다. 러시아 컵라면 시장 점유율 약 50~60%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 결제단말 기업 에보터(Evotor)에 따르면 지난해 비체인 소매점 기준 러시아 즉석라면 시장 점유율 1위는 팔도(54%)였다. 현지 브랜드 롤턴(Rollton)의 점유율은 21%, 삼양식품(003230)의 '불닭볶음면'은 9%로 집계됐다. 오뚜기(007310)는 미미한 수준이라 따로 집계되진 않았다. 농심도 공식적인 점유율은 없는 상태다.
팔도 도시락은 초기 진출 당시 저렴한 가격과 간편식 수요를 정확히 겨냥했고, 이후 현지 공장 설립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했다. 라면업계 관계자는 "러시아 소비자 입맛에 맞춘 순한 맛 중심의 제품 구성과 촘촘한 현지 유통망 구축이 맞물리면서 '국민 컵라면'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는 팔도의 핵심 해외 시장 중 하나다. 팔도의 러시아 판매법인 '도시락루스'의 지난해 매출은 5009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26% 증가한 수치다. 팔도는 러시아 K라면 시장 점유율 1위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팔도 관계자는 "러시아 시장에서 구축한 유통망과 브랜드 신뢰를 바탕으로 현지 맞춤형 제품과 마케팅을 강화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심이 후발주자로 러시아 시장에 진입하면서 경쟁 국면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업계 일각에선 후발주자로 뛰어든 농심이 무조건 불리한 건 아니라는 관측도 나온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농심은 이미 미국·중국·일본 등에서 생산과 유통을 동시에 구축해 봤고, '신라면' 등을 통해 글로벌 브랜드 인지도도 높은 편"이라고 했다. 농심은 지난해 기준 해외 매출 비중을 약 40%까지 끌어올렸고, 2030년에는 이를 60%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목표도 세운 상태다.
농심은 러시아 진출 초기엔 부산 녹산 수출전용공장을 통해 제품을 공급하고, 당분간 현지 생산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대신 신라면·너구리·김치라면 등을 중심으로 시장에 진입한 뒤 프리미엄 제품 전략을 통해 차별화에 나설 계획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축적한 브랜드 인지도와 유통 경험을 바탕으로 중장기적으로 시장 확대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향후 판도는 양사 전략에 따라 갈릴 것으로 보인다. 팔도는 현지 생산 기반을 통한 가격 경쟁력과 대중성을 유지 중이다. 농심은 프리미엄 제품 중심으로 차별화 전략을 검토하고 있다.
시장 환경도 변수다. 러시아는 즉석식품 소비 비중이 높고 라면을 한 끼 식사로 소비하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 매운맛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중저가 제품 중심으로 소비량이 많아 고가 제품 확장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현지 브랜드들이 저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점도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이종우 남서울대 유통마케팅학과 교수는 "뜨거운 물만 부어 간편하게 먹는 현지 소비 방식에 맞췄기 때문에 팔도 도시락이 성공한 것"이라며 "누가 현지 전략을 더 유연하게 구축하느냐에 따라 판도가 바뀔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