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현지 시각) 세계 최대 주류 전시회 프로바인(ProWein)이 열린 독일 뒤셀도르프 메쎄 전시장 제7관. 20여 명의 취재진이 진맥소주 부스 앞에 모여들었다. 독일의 스피리츠(Spirits·고도수 증류주) 전문가 위르겐 다이벨(Jürgen Deibel)이 이끄는 투어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그는 스피리츠 전시관에 참가한 수십 개 브랜드 가운데 20곳만을 선별해 소개했는데, 그중 하나로 한국의 진맥소주를 택했다.
다이벨은 지난해 진맥소주가 생산되는 안동 맹개마을을 방문했던 경험을 언급하며 "트랙터를 타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특별한 환경에서 이런 제품이 나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맛을 넘어 지역성과 브랜드의 서사가 술의 가치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 스피리츠 중심으로 재편된 전시장
일반적으로 스피리츠는 발효된 술을 증류해 알코올을 농축한 고도수 주류를 뜻한다. 위스키, 진, 보드카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프로바인에서는 이러한 스피리츠 부문을 '프로스피리츠(ProSpirits)'라는 별도 섹션으로 확대해 운영했다. 전체 7개 홀 가운데 2개 홀을 스피리츠 전용관으로 할애할 만큼 그 위상이 높아졌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주류 시장을 관통하는 '무알코올·저알코올(No & Low)' 트렌드가 이 고도주 섹션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프랭크 프랭크 슈나이더 프로바인 총괄 본부장은 "최근 와인과 스피리츠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흐름은 무알코올·저알코올 시장"이라며 "스피리츠 산업은 와인보다 이 분야에서 훨씬 앞서 있다"고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고도수 주류를 의미하던 스피리츠가 최근에는 풍미와 베이스 역할을 중심으로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진맥소주, 다농바이오, 백경증류소 등 한국의 프리미엄 증류주 브랜드들도 전시장에 부스를 마련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저도·무알코올 트렌드와 고도수 전통주는 상반된 방향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한국의 프리미엄 고도주 브랜드들에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무알코올 트렌드가 확산되는 이유는 소비자 인식이 변했기 때문이다. 술을 취하기 위해 마시지 않고, 한 잔을 마시더라도 원재료의 풍미가 살아있고 스토리가 있는 술을 선택하려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가치 소비'의 맥락에서 확실한 산지 특성과 장인 정신을 갖춘 한국의 증류주들이 글로벌 프리미엄 수요에 부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 소주 '이름 알리기' 끝… 경쟁력 증명 단계
이번 박람회에 참여한 한국 업체들의 공통된 목표는 명확했다. 소주를 기존의 저가 이미지에서 벗어나 '프리미엄 증류주(Premium Spirits)' 카테고리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선보인 제품은 서구권의 위스키나 진, 보드카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도수(40~50도 이상)와 복합적인 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품력은 이미 시장에서 입증되고 있다. 박성호 진맥소주 이사는 이날 조선비즈와 만나 "이달 영국 런던의 주류 전문 유통 채널인 위스키 익스체인지(The Whisky Exchange)에 입점했다"고 말했다. 위스키 익스체인지는 1999년 영국 런던에서 설립된 프리미엄 주류 전문점이다. 희귀하고 품질이 뛰어난 위스키와 스피리츠를 선별하여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점 자체만으로도 글로벌 시장에서 품질을 공인받았다는 상징성이 크다.
차별화된 제조 방식도 해외 바이어들의 눈길을 끌었다. 백경증류소는 쌀과 녹두를 활용한 전통 누룩 발효 방식으로 복합적인 향미를 구현했다. 정승안 백경증류소 이사는 "단일 효모 중심으로 만드는 일본 사케와 달리, 자연 발효 과정에서 형성된 다양한 미생물 군집이 풍미를 만들어 낸다"며 "부스를 찾은 바이어들이 쌀에서 어떻게 과실 맛이 나는지 신기해하더라. 특히 일부 제품은 글루텐이 포함되지 않아 관심을 모았다"고 했다.
다농바이오는 이번이 첫 해외 박람회 참가였지만, 벨기에와 영국 등에서 이미 수상한 경력이 있어 주목받았다. 장윤정 다농바이오 프로덕트 팀장은 "화이트 스피리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유럽 바이어들이 우리가 만든 위스키보다 오히려 증류식 소주인 '가무치'에 더 높은 관심을 보여 놀랐다"라고 말했다.
소주 OEM·ODM 업체인 리얼통상도 프로바인에 부스를 꾸렸다. 전 세계 24개국에 한국 술을 수출해 왔다. 강현천 리얼통상 대표는 "'한잔' 등 희석식 소주 매출 비중이 지금은 훨씬 크지만 프리미엄 증류주 '담소'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선 일반적으로 한국 소주는 초록병에 든 희석식 소주만 있는 줄 안다"라며 "그동안은 소주라는 이름 자체를 알리는 단계였다면, 이제는 어떤 소주인지 설명해야 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한국 주류에 대한 관심이 다양한 스타일과 서사를 가진 프리미엄 스피리츠로 확장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