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영유아 분유 대규모 리콜 사태가 확산하고 있다. 주요 글로벌 분유 기업들이 특정 원료 오염 문제로 잇따라 제품을 회수하면서 분유 공급망의 취약성이 드러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래픽=정서희

9일 로이터 통신과 AFP 등 외신에 따르면 이번 분유 리콜 사태는 지난해 12월 처음 수면 위로 떠올랐다. 프랑스에서 리콜 대상 제품을 섭취한 영아 3명이 사망하며 사태의 심각성이 커졌다. 프랑스 정부는 중국 우한(Wuhan) 소재 카비오 바이오텍이 공급한 아라키돈산(ARA) 오일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아라키돈산은 오메가-6 지방산으로 모유에 자연적으로 들어 있는 영양분이다. 분유 제조사들은 분유를 모유 성분과 최대한 비슷하게 맞추기 위해 아라키돈산을 오일 형태로 가공해 제품에 첨가한다. 그런데 이 원료에서 구토와 설사 등 식중독을 유발하는 독소 '세레울라이드'가 검출됐다. 일반적인 세균은 고온에서 가열하면 사멸하지만 세레울라이드는 열에 강해 분유 제조 과정의 고온 살균이나 가정에서 뜨거운 물로 분유를 탈 때도 파괴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네슬레, 다논, 락탈리스 등 글로벌 기업들은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대규모 자발적 회수 조치를 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관보를 통해 "중국산 아라키돈산 오일 수입과 관련해 강화된 수준의 공식 통제와 특별 조건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문제가 된 기업명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업체 '카비오 바이오테크'가 이번 사태의 원료 공급처로 지목돼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단순한 제조 공정상의 실수라기보다 글로벌 분유 업체들이 구축해 온 집중형 공급망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으로 보고 있다. 특정 원료 공급처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구조에서 한 공급처에 문제가 발생하자 여러 브랜드와 여러 국가로 동시에 파장이 확산됐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아라키돈산은 생산 기술과 설비 요건이 까다로워 공급업체 수가 제한적"이라며 "제조사들은 비용 효율성과 품질 표준화를 위해 소수 업체에서 원료를 일괄 조달해 온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아라키돈산 등 전문 원료를 공급하는 업체는 전 세계적으로 10개 미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분유 제조 업체 입장에서는 비용 절감을 위해 규제 기준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거나 생산비가 낮은 지역에서 원료를 조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힙의 힙 콤비오틱 유기농 라인업./힙 제공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일부 유럽 유기농 브랜드는 이번 위기를 피해 간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독일 유기농 분유 브랜드 힙(HiPP)의 힙 콤비오틱 유기농 라인은 리콜 명단에서 제외되며 관심을 받고 있다. 주요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산 아라키돈산 원료 오염 여파로 제품을 회수한 반면, 힙은 같은 성분을 사용하면서도 유럽 내 독립된 조달망을 유지해 이번 위기를 피해 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힙은 아라키돈산 오일을 유럽 내 독립 공급업체로부터 조달해 왔다고 설명했다. 논란이 된 공급업체의 원료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유 및 유청 등 주요 성분 또한 주로 독일과 인접한 EU 국가에서 공급받는다. 특히 6000개 이상의 유기농 농가와 직접 계약을 맺고 있어 생산 단계 전반을 직접 관리하고 있다. EU 유기농 규정뿐 아니라 바이오랜드(Bioland), 데메터(Demeter) 등 민간 인증 기준도 동시에 충족하며 공급원 추적, 지역 조달, 이중 인증 감사 등을 통해 외부 원료 혼입 가능성을 낮췄다.

또 힙은 원료 단계부터 다층적인 품질 관리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힙 관계자는 "아라키돈산 오일을 추출하는 특수 곰팡이 배양 초기 단계부터 엄격한 모니터링을 실시한다"며 "세레울라이드는 원인균인 바실루스 세레우스가 존재해야 생성되는데, 오일 추출 전 단계에서 원인균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완제품 단계에서 추가 테스트가 불필요할 정도로 안전성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독일 유기농 분유 브랜드 힙은 6000개 이상의 유기농 농가와 직접 계약을 맺고, 제조 각 단계를 직접 통제하고 있다. /힙 제공

이 외에도 ▲계약 농장의 토양 분석 및 작물 모니터링(수확 전 테스트) ▲제조 시설 입고 시 원료 테스트 ▲제형 및 혼합 중 공정 모니터링 ▲출시 전 최종 제품 미생물학적 및 화학적 테스트 ▲시판 후 감시를 위한 보관 샘플 유지 등 다중 검사 체계를 통해 완제품 단계 이전에 위험 요소를 걸러내고 있다.

다만 힙의 공급망 모델에도 한계는 있다. 유기농 원료와 계약 농가 중심으로 운영되는 구조 특성상 단기간에 생산량을 크게 늘리기는 어렵다. 유기농 농장은 인증 전환에 최소 2~3년이 걸리고, 유기농 원료 시장 규모 자체도 전체 농산물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이 때문에 유기농 중심 공급망은 대규모 생산 확대보다는 안정적인 공급과 품질 관리에 초점을 둔 구조라는 평가가 나온다. 힙 관계자는 "힙은 소매 가격이 타사 대비 15~30%가량 높지만 단순히 브랜드값이 아니라 안전한 공급망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반영된 결과"라며 "위기 상황에서 타사가 단기간에 따라할 수 없는 경쟁력"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