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신화에 따르면 술의 신 바쿠스는 어느 날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로마 인근 마시코 산을 찾는다. 이곳에는 팔레르누스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남루한 행색의 나그네가 신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자신이 정성껏 가꾼 채소와 우유를 내어놓았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손님을 극진히 대접한 것이다.
이에 감동한 바쿠스는 팔레르누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우유 그릇에 손을 대 진하고 붉은 포도주로 바꾸어 놓았다. 처음 보는 액체의 향과 맛에 놀란 팔레르누스에게 바쿠스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산 전체에 축복을 내렸다. 마시코 산은 순식간에 포도밭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때 생겨난 포도가 고대 로마인들이 '신의 선물'이라 부르던 팔레르니안(Falernian) 와인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로마 시대의 석학 플리니우스가 남긴 '박물지'에 따르면 팔레르니안 와인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와인 가운데 하나다. 그는 오래 숙성된 팔레르니안은 등불의 불꽃을 가까이 대면 불이 붙을 정도로 농밀하다고 했다. 그만큼 숙성 잠재력을 지녔으며, 고대 연회에서 특별한 자리에서만 개봉됐던 점을 고려하면 팔레르니안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귀족적 사치품에 가까운 존재였다.
팔레르니안의 정확한 품종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 산지가 현재 남부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역과 겹친다는 점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은 그 후예를 토착 품종 '알리아니코(Aglianico)'라고 보고 있다.
알리아니코의 가장 큰 특징은 늦은 성숙이다. 대부분의 유럽 레드 품종이 9월경 수확되는 반면 알리아니코는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포도나무에 남아 천천히 익는다. 껍질이 두껍고 산도가 높아 완전히 성숙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와인은 높은 산도와 강한 탄닌을 동시에 갖는다. 젊을 때는 단단하고 거칠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죽과 담배, 말린 꽃 향으로 변화하며 깊이를 더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알리아니코는 종종 이탈리아 북부의 명작 바롤로에 비견돼 '남부의 바롤로'라고 불린다. 따뜻한 남부에서 재배되지만 구조와 숙성 잠재력은 북부의 장기 숙성 와인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품종이 특히 잘 자라는 곳이 캄파니아주 아벨리노 내륙의 아르피니아(Irpinia)다. 나폴리 해안과 달리 이곳은 아펜니노 산맥 안쪽의 고지대다. 해발 500m 내외의 구릉지로 낮에는 햇빛이 강하고 밤에는 기온이 크게 떨어지는 큰 일교차가 나타난다.
여기에 토양은 베수비오 화산 활동의 영향을 받은 토양과 석회질, 점토가 섞여 있다. 이러한 환경은 포도의 당도를 과도하게 높이지 않으면서 산도를 유지시켜 긴장감과 균형을 만들어낸다.
이곳에 자리 잡은 가족경영 와이너리가 로까 델 프린시페(Rocca del Principe)다. 2000년대 초 본격적인 병입 생산을 시작한 비교적 젊은 생산자지만, 아르피니아 환경을 와인에 충실히 드러내는 스타일로 주목받는다.
로까 델 프린치페는 농축과 힘을 강조하기보다 균형과 산도를 중시한다. 과도한 오크 향을 덧입히기보다 발효 후 오크 숙성을 통해 탄닌을 정리하고 질감을 다듬는 방식이다. 단일 포도밭인 '캄포레(Campore)'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포도밭의 성격을 중심으로 와인을 해석하려는 접근이다. 포도밭은 남동향 경사면에 자리하며 수확량을 적게 관리해 과실의 농도와 구조를 확보한다.
알리아니코 아르피니아는 100% 알리아니코로 만들어진다. 늦가을 수확한 포도를 발효한 뒤 약 12개월 오크 숙성과 병 숙성을 거친다. 잔에 따르면 깊은 루비색을 띠며 블랙체리와 자두 같은 검붉은 과실 향이 먼저 나타나고, 이어 말린 허브와 향신료, 흙과 가죽의 뉘앙스가 이어진다. 높은 산도와 탄닌 덕분에 양고기나 스테이크 같은 육류 요리와 잘 어울린다. 2025 대한민국 주류대상 구대륙 레드 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 수입사는 원오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