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내수 침체가 전망되는 가운데 이재명 정부가 물가 안정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자, 식품업계에선 "내수 시장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고물가·고환율에 따른 부담은 커졌지만, 가격 인상은 어려워진 탓이다.
특히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물가 안정을 위한 정부의 압박이 더 커질 것으로 보여 식품업계는 해외 사업 확대를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17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국내 식품 시장의 성장세는 정체된 상태다. 고물가와 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소비 심리가 위축됐고, 식품 소비도 질적 개선보다 가격과 판촉 경쟁에만 머무는 추세다. 특히 가공식품은 대체재가 많아 가격을 올릴 경우 수요 이탈 가능성이 큰 만큼, 수익성 개선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까지 더해지면서 식품업계의 부담은 더 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담합으로 물가를 올린 기업에 대해 가격 조정 명령 제도를 활용하라"고 말했다. 이 제도는 공정거래법 42조에 근거한다. 담합 기업에 대해 담합을 중지·파기하게 하면서 담합한 가격을 철회하고 정당한 가격을 새로 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지난 2006년 공정위는 밀가루 물량과 가격을 담합한 8개 업체에 과징금 434억원과 가격 재결정 명령을 내렸다. 이후 해당 업체들은 주요 밀가루 제품 가격을 인하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 후 정부는 물가특별관리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키고 설탕·밀가루 등 민생 품목을 중심으로 점검에 나섰다. 업계 전반에서는 가격 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생 물가가 주요 정책 과제로 부각된 만큼, 당분간 가격 인상은 사실상 어렵다"며 "원재료 가격과 환율, 물류비 등 비용은 계속 오르지만, 이를 가격에 반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이런 환경에서 케이(K)푸드의 해외 시장 진출·확장은 사실상의 생존 전략이라는 평가가 대세다. 내수 침체가 고착되고 물가 안정이라는 정책적 변수까지 더해지면서, 국내 시장만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게 식품업계에 깔린 공감대다.
실제 주요 식품기업들의 지난해 실적 흐름을 보면 해외 사업이 국내 시장에서의 부진한 성적을 완충한 사례가 많다. CJ제일제당(097950)은 내수 부진과 원가 부담 여파로 영업이익은 줄었지만, 해외 식품 매출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만두와 김치 등 비비고 제품을 앞세운 해외 전략이 국내 사업의 부담을 상당 부분 상쇄한 것이다.
동원산업(006040)은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이 증가했다. 글로벌 아이돌 그룹 BTS 멤버 진을 모델로 한 참치 사업과 가정 간편식(HMR), 펫푸드 등 식품 계열사의 해외 수출이 늘면서 전체 매출 성장을 이끈 것이다.
삼양식품(003230)은 불닭(Buldak) 브랜드의 글로벌 흥행을 기반으로 사상 첫 2조원대 매출을 기록했다. 특히 해외 수요 확대에 대응하고자 생산 시설 증설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농심(004370)도 해외 비중 확대를 중장기 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현지 법인과 생산 라인 투자를 늘렸고, 수출 전용 공장을 가동해 글로벌 공급망을 강화하고 있다.
주류업계도 마찬가지다. 경기 침체에 더해 술을 많이 잘 마시지 않는 젊은 층의 음주 문화로 국내 주류 소비가 줄어들자, 롯데칠성(005300)음료는 순하리 등 과일 소주로 대표되는 K주류에 대한 해외 수요를 공략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흐름이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물가는 가장 체감도가 높은 민생 지표인 만큼, 정부가 물가 안정에 강한 드라이브를 거는 건 불가피하다"며 "고환율과 원자재 가격 인상 등 대외 변수까지 겹친 상황에서 물가 안정 기조는 선거 이후에도 상당 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한국은 이미 저성장 국면에 들어선 만큼, 식품기업들이 성장 여력이 있는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한 구조적 전환"이라며 "국내와 해외 매출 비중이 비슷한 기업만 살아남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