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년 전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중심지 피렌체는 인류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인 '르네상스'를 꽃피웠다. 신(神)의 질서에 갇혀 있던 중세 문화를 걷어내고 인간 본연의 가치와 창의성에 눈을 뜬 시기다. 당시 토스카나는 혁신과 예술의 성지였다. 현대 문명의 기틀을 마련했던 뜨거운 창조적 에너지는 수백 년이 흐른 뒤에도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르네상스의 기질이 와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발현된 것이 바로 오늘날의 슈퍼투스칸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와인법(DOC)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당시 토스카나의 대표 와인을 만들려면 전통 품종인 산지오베제만 써야 했고, 반드시 화이트 품종의 포도를 섞어야 했다. 화이트 품종을 섞다 보니 와인의 밀도가 떨어지고 결국 저품질 와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헥타르 당 최대 수확량, 숙성기간 등도 정해져 있어서 양조가들이 자신만의 개성 있는 스타일을 만들기 어려웠다. 이 조건을 하나라도 벗어나면 이탈리아 법체계 안에서 가장 낮은 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몇몇 생산자들이 과감히 반기를 들었다. 등급과 상관없이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생산자들이 생긴 것이다. 르네상스 거장들이 낡은 관습을 깨고 새로운 기법을 시도했듯, 사시카이아, 티냐넬로, 오르넬라이아 등 몇몇 브랜드들이 프랑스 보르도에서 건너온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같은 품종을 블렌딩한 와인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품종의 장점을 결합해 구조감과 풍미를 보완한 것이다. 이 와인들은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슈퍼투스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등급보다 본질적인 맛에 집중했던 그들의 정신은 오늘날 와인 애호가들이 토스카나 와인에 열광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바르바네라 가문이 내놓은 '지지노 그란데'는 이러한 슈퍼투스칸의 계보와 철학을 잇는 와인이다. 바르바네라는 1938년 설립 이후 80여 년간 4대째 가족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 와인 중 하나는 '지지노 그란데 토스카나 로쏘'다. '지지노(Gigino)'는 바르바네라 가문의 2대 경영자 루이지 바르바네라를 부르던 애칭이다.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업을 일구며 포도밭에 생을 바친 아버지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와인 전면에 내세웠다.
여기에 '위대하다'는 의미의 '그란데(Grande)'를 덧붙였다. 가문에서 생산하는 수많은 와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품질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결국 이 이름은 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만든, 가문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유산이라는 의미다.
바르바네라는 움브리아 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체토나 산기슭에 있다. 지형적으로 매우 독특한 기후 조건을 갖춘 곳이다. 낮에는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 강렬한 햇살이 포도 알맹이를 달콤하고 농밀하게 익힌다. 밤이 되면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공기가 포도나무의 열기를 식히며 신선한 산도를 보존한다. 극명한 일교차는 포도에 복합적인 풍미를 불어넣는 핵심 요소다. 자갈과 점토가 섞인 토양은 배수를 원활하게 하고, 포도나무의 뿌리를 깊게 내려 보다 응축된 풍미를 만든다.
지지노 그란데 토스카나 로쏘는 토스카나 토착 품종인 산지오베제를 기반으로 보르도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블렌딩했다. 이는 초기 슈퍼투스칸들이 세계적인 품질을 구현하기 위해 정립한 공통적인 방식이다. 특히 바르바네라에서는 포도 중 일부를 건조해 당분과 풍미를 높이는 기법을 적용한다. 일반적인 와인보다 묵직한 바디감, 파워풀한 구조감을 지니면서도, 섬세하고 우아한 향을 동시에 갖출 수 있게 된다.
품종별 특성에 맞춘 분리 숙성 또한 핵심이다. 산지오베제와 국제 품종들을 각기 다른 시기에 수확해 개별 숙성한 뒤, 최종 단계에서 블렌딩한다. 오크통에서의 긴 숙성을 통해 포도의 탄닌을 안정화한다.
농밀하고 불투명할 만큼 진한 짙은 자줏빛이다. 아마레나 체리, 레드커런트 잼 같은 붉은 과실의 향이 두드러지고 바닐라와 카라멜의 섬세하고 복합적인 향이 이어진다. 묵직하고 길게 여운이 이어지며 견과류, 다크초콜릿, 아라비카 커피 향으로 마무리된다. 고기류, 버섯 리조또, 오래 숙성된 치즈와 잘 어울린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평론가 루카 마로니로부터 99점, 2025 대한민국 주류대상 구대륙 레드 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 수입사는 올빈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