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술이 '독한 술' 이미지를 벗고 있습니다. 과일 향을 입히고 도수를 낮춘 데다, 캔을 따자마자 마실 수 있는 RTD(Ready to Drink) 형태로 바꾼 '마시기 쉬운' 술로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일러스트 = 챗gpt 달리

12일 주류업계에 따르면 최근 케이(K) 술은 과일 향과 저(低) 도수, RTD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볍게 즐기는 술'을 지향하는 흐름이 확산하면서 미국뿐 아니라 일본·동남아시아 등에서도 위스키 대신 하이볼, 소주 대신 과일소주를 고르는 소비가 늘어나자, 이를 반영한 것입니다.

이 같은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가수 지드래곤(GD)의 '피스마이너스원 하이볼'입니다. 와인 베이스의 하이볼로 알코올 도수는 4.5%로 전통적인 위스키 하이볼과 달리 가벼운 게 특징입니다. 지난해 4월 한국에서 출시된 이후 초기 물량 88만캔이 3일 만에 완판되고, 누적 판매량이 1000만캔을 돌파했습니다. 현재 홍콩과 대만,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주요 국가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최근엔 미국 시장에도 진출했습니다. 미국 식품 전문지 '푸드 앤 베버리지 매거진(Food & Beverage Magazine)'에 따르면 피스마이너스원 하이볼은 로스앤젤레스 대표 RTD 브랜드 'LA소주'와 파트너십을 맺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 하이볼 시리즈는 캘리포니아의 일부 레스토랑·세븐일레븐 매장, 뉴저지·뉴욕의 젠 코리아 비비큐 하우스 등에서 판매될 예정입니다.

과일소주의 약진도 뚜렷합니다. 관세청에 따르면 과일소주가 포함된 기타 리큐어 수출액은 2011년 61만달러(한화 약 8억9000만원)에서 2024년 9629만달러(약 1405억원)로 150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일반 소주 수출액은 2024년 기준 1억341만달러(약 1509억원) 수준입니다. 과일소주가 일반 소주와 비슷한 규모까지 따라붙은 셈이죠.

여기에 전체 소주 수출량도 커졌습니다. 관세청에 따르면 2024년 한국 소주류(일반 소주+기타 리큐어 포함) 수출액은 처음으로 2억달러(약 2919억원)를 넘었고, 수출 대상국도 90개국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과거 한인 밀집 지역에서만 소비됐던 소주 시장이 일본·중국·동남아시아·북미·유럽 등으로까지 넓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일본, 베트남, 태국, 필리핀, 미국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도수가 낮은 한국 술이나 과일소주의 수입이 꾸준히 늘고 있다"며 "특히 최근 들어 동남아시아와 미국에서 달콤한 맛과 낮은 도수의 술이 현지 음주 문화와 잘 맞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소비가 확대되는 추세"라고 했습니다.

대만 타이베이시의 한 세븐일레븐 매장에 진열돼 있는 피스마이너스원 하이볼(왼쪽)과 한 식당 냉장고에 마련돼 있었던 순하리 등 한국 소주 제품들. /민영빈 기자

이에 국내 기업들의 전략도 바뀌고 있습니다. 롯데칠성(005300)음료는 대표 과일소주 '순하리'와 무가당 소주 '새로'를 앞세워 미국·유럽·동남아시아 등으로 유통망을 넓히고 있습니다. 특히 해외 생산·유통 거점을 활용한 장기적인 글로벌 생산·유통 시스템 구축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이트진로(000080)는 해외 생산 체계 구축에 나섰습니다. 베트남 타이빈성에 짓는 중인 첫 해외 소주 생산 공장을 올해 완공하는 게 목표입니다. 이를 글로벌 거점으로 활용해 물류비·관세 부담을 줄여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동남아시아를 넘어 북미·유럽 시장까지 공급하는 구조를 만들 계획입니다. CJ제일제당(097950)도 주력 식품 사업과 연계해 프리미엄 증류주 브랜드 '자리(JARI)'를 내세워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일본·유럽까지 판로를 넓히고 있습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마시기 쉬운 술을 즐기는 게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며 "각국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얼마나 현지화됐는지가 K술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K콘텐츠·푸드와 결합한 한국 술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높다"며 "전통주를 포함한 한국 술을 잘 발굴해서 선보인다면 K푸드 열풍에 힘입은 K술 시장도 더 커질 것"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