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마오리어는 단순히 사라져가는 원주민 언어가 아니다. 이 땅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수백 년간 사용해 온 언어로, 자연과 장소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담고 있다. 산과 강, 바람과 땅에는 모두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는 지형의 특징과 역사,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함께 담긴다. 오늘날 뉴질랜드 정부와 공공기관, 관광·농업·와인 산업 전반에서 마오리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뉴질랜드의 뿌리와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언어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다.

마오리어는 '이곳이 어떤 땅인가'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마오리족은 자신을 소개할 때 이름보다 먼저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과 연결된 산과 강, 바다와 땅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 강에서 왔고, 이 산을 바라보며 자랐다"는 식이다. 이런 문화를 '페페하'라고 부른다. 장소를 말하는 것이 곧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땅에 속한 존재라는 사고방식이 담겨 있다.

와인에서도 이 사고방식은 그대로 이어진다. 뉴질랜드 와이너리들의 레이블에서 마오리어를 종종 볼 수 있는 이유다. 브랜드나 품종보다, 이 와인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마오리어가 활용된다. 와인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출신 지역을 먼저 밝히는, 일종의 페페하 방식을 따르는 셈이다. 땅의 주인이었던 마오리족의 역사에 대한 존중, 그리고 그 땅에서 난 포도의 정체성을 순수하게 표현하겠다는 철학이 함께 담겨 있다.

그래픽=손민균

라파우라 스프링스(Rapaura Springs) 와이너리도 장소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생산자다. 와이너리 이름은 말보로 와이라우 밸리 인근의 라파우라 지역에서 유래했다. 라파우라는 마오리어로 '흐르는 물의 평원'이라는 뜻이다. 과거 하천의 흐름과 퇴적 작용으로 형성된 자갈층이 넓게 분포한 지역으로, 배수가 뛰어나고 낮 동안 머금은 태양열을 밤까지 유지하는 특성을 지닌다. 포도나무가 뿌리를 깊게 내리기에 적합한 조건이다.

라파우라 스프링스의 프리미엄 라인업인 '로헤(Rohe)'는 마오리어로 영역, 구역, 경계를 뜻한다. 말보로라는 하나의 산지 안에서도 서로 다른 자연조건을 가진 소지역을 구분해 보여주겠다는 의도다. 여러 지역의 포도를 섞지 않고, 특정 지역의 특징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점이 이 라인의 핵심이다.

로헤 라인업 중 '블라인드 리버 소비뇽 블랑'은 뉴질랜드 남섬 말보로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블라인드 리버라는 구역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었다. 이 지역은 지형적 특성 때문에 강이 바다로 바로 빠져나가지 못해 '눈먼 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말보로 내에서도 기온이 낮고 바람이 강한 곳으로 꼽히며, 전통적인 강변 포도밭과 달리 건조한 기후와 해풍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이처럼 혹독한 환경은 포도나무의 생육을 자연스럽게 제한한다. 수확량은 많지 않지만, 그만큼 향과 풍미가 응축된 포도가 만들어진다. 블라인드 리버 소비뇽 블랑이 더 직선적이고 긴장감 있는 스타일을 보이는 이유다.

포도는 서늘한 조건에서 수확한 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선별된 효모 균주로 발효한다. 효모 균주의 활성화를 위해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서 발효를 진행한다. 3개월간 효모 침전물 위에 숙성 후 병입한다. 이러한 과정은 신선한 과일 향과 산도를 선명하게 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잔을 기울이면 레몬그라스와 잘 익은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또렷하게 올라온다. 입안에서는 자몽, 레몬그라스, 멜론 풍미가 층층이 펼쳐지며, 풍부한 산도와 탄탄한 질감이 균형을 이룬다. 깔끔하면서도 집중도 있는 구조가 긴 여운으로 이어진다. 흰 육류, 익힌 해산물과 생해산물, 흰살생선, 채소 요리, 부드러운 치즈, 파스타나 피자 같은 밀가루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2023 빈티지는 제임스 서클링 90점을 받았다. 2025 대한민국 주류대상 신대륙 화이트 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 수입사는 금양인터내셔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