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K)팝', 'K드라마'로 대표되던 'K'의 영향력이 여러 유통산업 분야에서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다. 과거 해외 진출 과정에서 현지화는 필수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한국만의 고유한 방식과 감성이 오히려 새 표준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경쟁력이 된 사례들을 조명하고, 앞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K'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과거 한국 식품 업계가 해외 시장을 두드릴 때 선택했던 전략은 철저한 '현지화'였다. 매운맛을 줄이고 현지인에게 익숙한 식재료로 대체하는 것이 기본 전략으로 통했다. 한국 음식의 개성을 누그러뜨려 '무난한 아시아 음식'으로 포지셔닝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시장의 소비 트렌드는 이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해외 소비자들은 드라마 속 주인공이 먹던 매운 떡볶이를 찾고,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SNS) 챌린지에서 본 매운맛 라면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길 원한다. 현지화라는 오랜 문법 대신, 'K오리지널' 라이프스타일을 통째로 이식하는 방식이 새로운 흥행 공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K오리지널' 그대로 이식한 한식의 역습
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미식의 격전지로 꼽히는 미국 뉴욕에서 한식의 위상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한식은 더 이상 이색적인 음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련된 미식의 한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식 돼지국밥 전문점 옥동식은 자극적인 양념이나 현지화된 메뉴 구성 대신, 한국의 방식 그대로 맑고 깊은 국물의 곰탕을 선보이고 있다. 2016년 서울에 처음 문을 열었고 6차례 미슐랭 빕그루망에 선정됐다. 한국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2022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 진출했고, 국밥이라는 개념이 낯선 뉴요커들도 긴 줄을 서는 진풍경을 자아냈다. 뉴욕 진출 이듬해인 2023년엔 뉴욕타임스(NYT)가 선정한 '뉴욕 최고의 요리 8선' 중 하나로 꼽혔다. NYT는 옥동식의 돼지국밥에 대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국물"이라며 "특별한 날에 먹으면 더 좋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식의 위상은 하이엔드(최고급) 미식 시장에서도 빛을 발한다. 한식 파인다이닝들이 뉴욕에서 가장 예약하기 힘든 식당에 손꼽히고 있다. 미슐랭 3스타를 획득한 '정식(Jungsik)'을 필두로, 2스타 '아토믹스(Atomix)' 등 뉴욕 내 미슐랭 스타를 받은 한식당은 13곳에 달한다. 한식이 더 이상 저렴한 길거리 음식이 아니라, 전 세계 미식 트렌드를 선도하는 정점에 서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셈이다.
NYT는 '2024년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 100곳'에 한식당 7곳을 선정했다. 아토믹스는 100곳 중 4위로 선정되며 한식당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NYT는 아토믹스에 대해 "현지에서 채취한 족제비쑥 등 새로운 식재료를 사용하고, 전통을 기반으로 한 실험을 거듭하며, 더 넓은 맥락에서 한국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한국적 도자기와 직물, 젓가락 등과 함께 음식을 제공한다"고 소개했다.
◇만두부터 라면까지… 글로벌 시장 판도 바꾼 '한국의 맛'
기업들의 활약도 주목된다. 현재 미국 가정용 만두 시장 1위는 CJ제일제당(097950)의 '비비고 만두'다. CJ제일제당은 중국식 '딤섬'이나 일본식 '교자'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관련 시장에서 한국식 만두 고유의 특징을 전면에 내세웠다. 얇은 피와 꽉 찬 채소 소를 강조한 것이다. 아시아 음식의 하위 범주가 아니라, 독립적인 카테고리로 자리 잡겠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를 통해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식사'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며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CJ제일제당은 오는 2030년 '글로벌 톱 5 식품기업' 도약을 목표로 해외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시적인 성과도 내고 있다. CJ제일제당의 해외 식품 사업 매출은 2022년 5조1811억원에서 2023년 5조3861억원, 2024년 5조5814억 원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전체 매출 중 해외 비중 역시 2022년 47%에서 2024년 49.2%까지 증가했다.
삼양식품(003230)의 '불닭볶음면'은 단순한 제품을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됐다. SNS상에서 '불닭 챌린지'가 놀이 문화로 정착하면서, 삼양식품은 매운맛을 현지에 맞춰 완화하기보다 '한국식 매운맛'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했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맛을 그대로 유지했음에도 전 세계 젊은 층 사이에서 하나의 문화 코드로 소비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삼양식품의 해외 매출 비중은 2022년 66.6%에서 2024년 77.3%까지 증가했다.
◇ 파인다이닝과 함께 한국 술 알린다
주류 시장에서도 한국 술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하이트진로(000080)의 '진로(JINRO)'는 소주 고유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전 세계 증류주 판매량 1위 자리를 수년째 굳건히 지키고 있다. 여기에 아티스트 박재범이 론칭한 '원소주'처럼 프리미엄 증류식 소주 브랜드가 등장하며 한국 술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다.
일부 해외 한식 파인다이닝에서는 한국 술을 와인이나 사케처럼 페어링의 한 축으로 제안하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뉴욕의 한식 파인다이닝 '주옥'에서는 '안동진맥소주'와 같은 전통주를 페어링 메뉴에 포함해 한국 술의 깊은 풍미를 전 세계 미식가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작년 12월에는 CJ제일제당이 미국 뉴욕의 한식당 '호족반', '나리'와 협업해 전통주 문화를 알리는 행사(The Korean Table-Sip&pair by jari)를 열었다. 올해 하반기 미국에서 프리미엄 증류주 브랜드 'jari'(자리)를 출시하기 전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이준모 나리 대표는 "K푸드가 세계적으로 자리 잡은 만큼, 한국 술을 알리기 위한 시도가 꾸준히 이어진다면 한식과 함께 즐기는 문화도 확산할 것"이라고 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이 작년 11월 발표한 '2025년 해외 한식 소비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국에서 한식 소비자들의 인지도·호감도·만족도 모두가 꾸준히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22개국 주요 도시에 거주하는 20~59세 현지인 1만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한식 인지도는 68.6%, 호감도는 71.4%, 만족도는 94.2%로 집계됐다. 최근 1년간 한식당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해외 소비자는 71.7%에 달했다. 한 달에 한식당을 찾는 빈도는 평균 2회로, 2023년 1.7회보다 늘었다. 응답자 중 14%가 '한국식 치킨'을 가장 선호하는 한식으로 선택했다. 이어 김치(9.5%), 비빔밥(8.2%), 불고기(5.6%), 라면(5.1%) 순으로 집계됐다.
정경석 농식품부 식품산업정책관은 "해외 각국에서 한식이 '건강하고 신선한 음식'으로 자리 잡으며 세계 소비자들의 긍정적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며 "앞으로 해외 우수 한식당 지정을 확대하고 지역별 소비 특성에 맞춘 한식 진흥 전략을 강화해 세계시장에서 한식의 위상을 높이겠다"고 했다.